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구원파 이단으로 분류되는 대한예수교침례회(생명의말씀선교회, 대침)에 대하여 논쟁을 할 때면 가장 핵심적으로 언제나 구원론에 해당하는 부분이 심각한 화두로 떠오르게 될 때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파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는 장소라면 어디든 구원이라는 교리에 관련된 거의 모든 이론과 가설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소위 ‘새 관점(new perspective)’에 대한 내용들은 이런 대화의 장에서 거의 등장하지 않거나 혹은 너무 피상적으로만 다뤄지는 경우들이 많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새 관점의 특정 견해나 혹은 새 관점의 특정 학자가 내린 특정 결론 중 일부분만을 취해 자신의 견해를 강화하는 것에 사용하거나, 더 나쁘게는 조직신학자들이 새 관점을 다루는 순수한 교의적인 관점에서만 이것을 평가하고 파악한다. 그래서 이것과 관련된 대화들은 종종 혼란스러운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곤 한다.
신학에 대해서나 성경에 대해서 조금의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대개 ‘새 관점’이라는 것을 들어봤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의 시작을 알리는 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거나 알더라도 직접적으로 읽어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요약 정리에만 의존한다. 하지만 새 관점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에 대해 알고 그것의 시초가 되는 책을 직접 읽어보지 않는 한, 어째서 현대의 신학자들이 칭의론에 대한 많은 입장을 수정하였는지, 그리고 저명한 바울 신학의 대가인 김세윤 교수가 소위 “유보적 칭의론”이라 비판 받은 칭의론을 말할 수밖에 없었는지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논쟁들이 그저 교리에 대한 논쟁이라고 생각한다. 새 관점 학자들을 섣불리 비판했던 많은 목회자들과 학자들 역시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하고 전투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상 그것은 제 2 성전기 유대 문헌 및 초기 유대교의 랍비 문헌, 그리고 헬라어 성서 본문의 해석에 달려 있다. 따라서 문제는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 관점이라 불리는 견해를 비판할 때에 매우 신중해야 한다.
영미권의 경우 새 관점의 과열된 논쟁이 현재는 정리 수순에 들어간 것 같다. 그들은 이제 전통적인 종교개혁의 사상인 옛 관점과 새 관점을 통합하는 견해나 혹은 그 둘을 모두 초월하여 또다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학문적 논의로 나아가고 있다. 가장 주목할만한 것은 옛 관점 학자들과 새 관점 학자들이 서로 논쟁하는 과정에서 적게나 많게나 영향을 주고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에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새 관점 자체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다. 혹은 새 관점에 대해 알더라도 그것을 반펠라기우스, 혹은 아르미니우스 등의 기존에 있던 교리적 틀에 끼워 맞춘 뒤 조직신학의 범례에 따라 평가하려고 하는 것 같다. 필자는 인터넷에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와 같이 부당하게 새 관점과 관련된 논의들을 다루는 것을 매우 자주 목격하였다.
이것은 대침을 다루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 구원파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은 구원론에 크게 비중을 두는 편이다. 그러나 그들은 가장 민감한 이 주제에 결정적인 변화를 초래한 새 관점에 대해 거의 무지한 경우가 많다. 아니면 새 관점은 그저 교리적인 스펙트럼의 하나라고 간주하고 교의적 논쟁을 통해 이것을 해결하려고 시도하기도 한다. 그들에게 새 관점은 그저 바울이 전하는 이신칭의의 교리를 오염시키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으로 여겨지는 것 같다.
이제 필자가 책 리뷰를 할 때에 그 첫 시작으로 E. P. 샌더스(E. P. Sanders)의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Paul and Palestinian Judaism)』, 일명 “PPJ”를 고른 것은 사실 구원파와 관련된 이 모든 논의의 중심을 관통하는, 그리고 심지어 종교개혁자들의 칭의론을 고수하는 전통적인 견해의 핵심을 관통하는 모든 것의 시작을 알린 책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을 구원 자체에 대해 깊이 숙고하는, 특히 이신칭의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반드시 필수적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현대의 신약학자들이 논쟁하고 다루는 것들의 중요성과 의미를 추적하는 데에 결정적으로 실패할 것이다.
저자: E. P. Sanders
제목: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Paul and Palestinian Judaism) 40주년 기념 한국어판
번역: 박규태
출판사: 알맹e
가격: 98,000
1176 페이지.
새 관점에 대해 처음 접하다
처음 필자가 이 책을 사리라 마음을 먹었던 것은 더글라스 무(Douglas J. Moo)의 NICNT로마서 주석(2015년 한국어 판)을 읽던 중 새 관점에 대한 내용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 당시 구원파에서 나온 뒤 여러 조직신학 책들을 읽으며 개혁주의 교리로 무장하고 있던 필자는 상당히 교만한 사람이었다. 엔간한 성경에 대한 진리는 이미 확실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했고, 성경이 말하는 것은 매우 분명하다고 아주 쉽게 생각했다. 필자 스스로가 성경을 정말 잘 알고 있다고 자신했다. 심지어 헬라어나 히브리어는 단 한 자도 읽을 수 없었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더글라스 무는 새 관점에 대해서 매우 신중하게, 그리고 길고 상세하게 다루며 논박했다. 필자는 이것을 보면서 매우 의아해 했는데, 왜냐하면 (당시 교만했던 필자의 생각에는) 새 관점 학자들의 주장이 터무니 없고 비성경적이며 과격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거의 논박할 가치가 없는 그런 이론을 가지고 저명한 신약학자인 더글라스 무가 씨름하고 있다는 것이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은 필자의 호기심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필자는 새 관점에 대해서 인터넷에 검색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많은 학자들이 이것에 대해 매우 논쟁적이며, 그 결론이 쉽게 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새 관점으로 분류되는 톰 라이트(N. T. Wright)와 복음주의권에서 매우 인지도 있는 존 파이퍼(John Piper) 목사와의 논쟁이 매우 유명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존 파이퍼가 톰 라이트에게 사실상 패배했다고 지적하고 있었다.
그 중에는 어떤 사람이 소개하는 샌더스와 더글라스 무의 토론에 대한 다음과 같은 재밌는 일화도 있었다:
E. P. 샌더스: 무 박사님, 박사님께서는 히브리어로 쓰인 미쉬나 문헌을 모두 읽어 보았습니까?
더글라스 무: 아니요. 읽지 못했습니다.
E. P. 샌더스: 나는 읽었습니다. 당신이 이 토론 자리에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는지 의문이군요.
이 때부터 뭔가 새 관점이라는 것이 심상치 않은 것임을 필자는 직감했다. 그리고 새 관점에 대해서 좀 더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강하게 들었다. 많은 사람들은 톰 라이트나 제임스 던(James D.G. Dunn)의 저서를 주로 읽는 것으로 보였으나, 필자는 1977년 새 관점이라는 것이 탄생하게 된 계기였던 PPJ, 곧 “Paul and Palestinian Judaism”을 먼저 읽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때마침 알맹e 저작권 에이전시에서 PPJ 40주년 기념판을 한국어로 출판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필자는 고민하지 않고 바로 책을 구매하였다.
유대교와 바울
흔히 새 관점을 논할 때에 그 문제의 근원적인 부분이 교리적 논쟁이라고 착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이 문제에서 본질적인 것은 과연 현재 우리들이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는 “유대교”의 교리적 묘사가 정말 1세기 팔레스타인 유대교의 실제 교리와 일치하는 것인가이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아주 단순하게 유대교는 “행위 구원론자”인 것으로 여긴다. 그리고 이것을 전제한 상태에서 신약성경의 여러 본문들을 해석한다. 그래서 유대교는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는 종교이고, 기독교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종교인 것으로 생각한다. 즉, 성경은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으려 하는 행위 구원과 오직 믿음으로 칭의를 받는 믿음 구원의 대결 구도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샌더스는 이 책에서 이러한 관점이 정말 그러한 것인가를 성경을 해석한 신학자들의 교리적 입장이나 주장이 아니라 실제 그 당시의 유대적 문헌들을 분석함으로써 확인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그는 이것을 위해 랍비 문헌인 탄나임 문헌들, 쿰란 동굴에서 발견된 사해사본들, 그리고 유대교의 외경과 위경 등을 모두 철저하게 검토한다. 실제로 그의 책의 거의 대부분이 (무려 700여 페이지가 넘는 분량) 이러한 유대교 문헌들에서 드러난 율법, 의롭다 함, 구원, 예정과 선택, 은혜 등에 대한 가르침과 사상들을 확인하고 논하는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점에서 샌더스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가 내린 결론은 유대교는 행위 구원의 종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많은 유대 문헌들은 분명하게 유대인들이 구원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한다고 묘사한다. 그리고 율법은 이러한 언약의 영역 안에 머무르는 수단이자, 언약 안의 사람임을 나타내는 증표이다. 심지어 어떤 유대 문헌에서는 매우 심각한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적절한 속죄 절차를 따른다면 언약의 영역 밖으로 쫓겨나지 않고 용서를 얻는 것으로 묘사한다. 샌더스는 이러한 유대교의 교리 체계를 “언약적 율법주의”라 명명한다.
따라서 샌더스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언약으로 구원을 얻되, 율법은 그 안에 “머무르는” 수단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만약 유대인들이 정말로 행위 구원론자들이 아닌 “언약적 율법주의자”들이었다면, 우리는 유대교에 대한 우리 각자의 인식에 큰 변화를 주어야 할 지도 모른다.
그리고 샌더스는 이러한 유대교에 대한 인식 변화가 우리의 신학에 끼칠 영향에 대해 다루기 시작한다. 그것은 바로 바울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다. 이제까지 우리는 바울의 서신들에서 그가 믿음과 행함을 대조하고, 행위 구원을 배격하고 있으며, 행위 구원론을 말하는 유대교를 이러한 이유에서 비판하고 있다고 여겨왔다. 그러나 샌더스의 연구에 의하면 유대교는 사실상 행위 구원을 가르치지 않는다. 유대인들에게 행함은 구원에 들어가는 조건이 아니라, 이미 들어간 언약 안에 머무르는 조건이다. 심지어 많은 유대인들이 이것을 엄격하게 적용하지도 않는다. 이스라엘 밖으로 나갈 정도로 언약을 배반하는 매우 큰 죄가 아니라면,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죄를 짓는다고 하여서 언약에서 쉽게 퇴출된다고 여기지 않았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바울이 쓴 “행함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유대교를 향한 비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바울이 유대교를 오해한 것인가? 이럴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바울 자신이 유대교적 배경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매우 유명한 랍비인 랍반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유대교 체계들을 학습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샌더스는 바울이 비판한 것이 유대교가 행위 구원론을 말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바울이 유대교를 오해하지 않았다면, 그가 유대교의 행위 구원론적 사상을 주로 비판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바울이 유대교를 비판한 것은 유대교 안에 “그리스도 예수”가 없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즉 바울은 행함과 믿음을 대조하고 있다기 보다는, 언약적 율법 체계와 그리스도 예수의 체계를 대조하고 있는 셈이다.
샌더스의 연구에 대한 반응
샌더스의 이러한 연구와 결론은 많은 호응과 많은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제임스 던이나 톰 라이트와 같은 학자들이 샌더스의 연구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바울이 행위를 배격하여 믿음을 강조한다는 사상이 성경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떤 학자들은 바울의 사상에서 언약적 율법주의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고 여기기도 했다.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이 등장한 것이다.
또 다른 학자들은 샌더스의 연구 자체가 정말 철저한 것이었는지 확인하기로 하였으며, D. A. 카슨(D. A. Carson)을 중심으로 유대 문헌들 전부를 보다 면밀하고 세세하게 조사하는 프로젝트가 꾸려졌다. 그리고 이런 학자들은 샌더스의 언약적 율법주의에 대한 결론이 다소 성급한 것이었다고 지적했다. 왜냐하면 유대 문헌들을 살펴본 결과 각 분파마다 교리가 매우 다양했기 때문이다. 어떤 분파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상당히 강조하기도 했지만, 또 다른 분파의 경우에는 행위 구원에 가까운 내용을 주장하기도 했다. (물론 필자는 이것이 과연 결정적인 것인가 의문이긴 하다. 그렇다면 바울은 유대교의 일부 분파의 견해만을 지엽적으로 비판한 것인가?)
그리고 존 파이퍼가 이 논쟁에 뛰어들면서 이제 논의는 신약학계를 넘어 조직신학 분야에까지 확산되었다. 마이클 호튼(Michael Horton)이나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McGrath)와 같은 학자들은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이 종교개혁자들의 이신칭의의 교리를 위협할 수 있음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개혁주의적 관점을 공유하는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새 관점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물론 그 중에는 마이클 F. 버드(Michael F. Bird)와 같이 개혁주의 관점을 유지하면서도 새 관점 학자들의 주장을 진지하게 수용하는 학자들도 존재하긴 했지만 말이다.
샌더스의 연구가 많은 사람들에게 이처럼 뜨거운 반응을 일으켰던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는 그것이 성경의 해석 틀을 재설정한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종교개혁 이후 기독교인들은 믿음-행함의 틀로 성경의 본문들을 해석해 왔다. 그래서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얻는 것이기에, 성경에 있는 본문들은 모두 이 틀에 맞춰 해석되어야 한다는 관점을 당연한듯이 전제하고 있었다.
특히 바울의 로마서가 그것을 가장 잘 나타낸 책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율법주의자들인 유대인들에 맞서 오직 믿음을 부르짖은 사도로 기억되었다. 이 때문에 성경 본문의 많은 행위를 강조하는 본문들이 부당한 취급을 받았다. 왜냐하면 이런 본문들은 ‘오직 믿음’이라는 틀에 맞춰 그 ‘진짜 의미’가 따로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 강조하는 ‘행함’은 단지 믿음을 증거하는 의미에서만 다뤄져야 한다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성경 본문을 다루는 것은 특정 사상(특별히 종교개혁의 교리 체계)에 기반하여 의도적 해석을 하는 것이다. 만약 바울이 종교개혁자들이 집중한 관점과는 다르게 믿음-행함의 틀로 구원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토라의 체계-예수 그리스도의 체계의 대조로 구원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바울 및 예수님과 다른 사도들의 가르침에서 굳이 행함에 대한 것을 믿음의 틀에 맞춰 다르게 해석할 필요가 없을 수도 있다.
더욱이 만약 유대교가 언약적 율법주의와 같이 행함이 구원에 “들어가는 조건”이 아니라 “머무르는 조건”이라고 여겼다면, 사도들이 이미 의롭다 여김을 받은 신자들에게 구원을 위해 행함을 강조하는 많은 본문들이 더욱 적절히 해석될 수 있다. 어떤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바울 역시 언약적 율법주의와 비슷한 관점에서 교리를 진술했다면 말이다. (물론 필자는 이렇게 간단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샌더스의 저서를 읽고 신약성경의 교리들을 더욱 면밀하게 살펴본 학자들이 이와 같은 방향으로 나아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래서 톰 라이트는 우리가 믿음으로 법정적인 칭의 선언을 받지만, 최후 심판에서의 최종적인 판결은 우리 인생 전체의 행함을 통해 평가받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제임스 던 역시 성경에서 행함을 강조하는 많은 본문들을 부당하게 대우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 성경의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믿음을 강조하는 본문과 행함을 강조하는 본문을 섣불리 통합시키려고 억지로 시도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김세윤 교수 역시 유보적 칭의론을 통해 이와 같은 관점을 놓치지 않으려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필자가 보기에 이런 새 관점 학자들의 견해는 논박하기가 만만치 않다. 그들의 견해는 어떤 교리적인 사색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성경 본문의 탄탄한 헬라어 주해에서 나온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칭의가 어떻고 성화가 어떻고 칼뱅이 어떻고 행위 구원이 어떻고 하는 주장으로는 이들의 견해를 제대로 다뤘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대부분의 비판들이 이런 수준에 머문다.)
한국에서는 많은 교수들, 특히 개혁주의 입장에 서 있는 조직신학 분야의 교수들이 김세윤 교수의 유보적 칭의론을 다루면서 새 관점에 대해 비판하였다. 개혁주의 학자들 입장에서 새 관점 학자들의 견해는 마치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지 못하고 로마 가톨릭의 견해에 가까워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대개 이런 비판들은 기존 개혁주의 교리에 대한 논리적 추론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들이 많았다. 그 보다는 성경 본문에 집중하여 새 관점 학자들의 성서 주해 자체에 오류가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 더욱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새 관점 학자들이 던진 화두는 구원파적 교리 틀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매우 민감한 주제가 된다. 구원은 정말 오직 믿음으로 이미 얻은 것인가? 그래서 나의 행함과는 무관한 것인가? 새 관점 학자들, 그리고 새 관점과 논쟁한 신약학자들, 그리고 일부 진보적인 개혁주의 학자들은 이 견해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들의 신중한 성서 해석에 의하면 믿음과 행함은 구원에 모두 필요하다. 야고보가 말한대로, 믿음으로만이 아니라, 믿음과 행함인 것이다. 물론 행함을 믿음 안에 종속시키는 정도에 따라 다양하게 스펙트럼이 나눠질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행함은 최종 판결에서 필수적이라고 많은 학자들이 여길 것이다.
이것은 구원파 3교단에서 가르치는 내용과 매우 큰 차이가 있다. 그리고 이런 차이는 단순히 교리적 사색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유대 문헌들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신약 성서 헬라어 본문에 대한 상세한 주해에서 나온 것이다.
이 모든 논쟁들을 시작하게 만든 책이 바로 이 E. P. 샌더스(E. P. Sanders)의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Paul and Palestinian Judaism)』이다. 물론 이 책은 상당히 두껍고 내용도 어려운 편이다. 그러나 위의 새 관점에 대한, 그리고 현대 신약학자들의 논의들에 대한 것들을 상세하게 알기 원하는 분들에게 이 책은 정말 좋은 시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알기로 해당 책의 전자책과 “간추린 판” 역시 존재하기 때문에 이런 것들로도 좋은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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