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 생활! -85화- 우리 교회 아이들 (기독교 이단 웹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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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 생활! -85화- 우리 교회 아이들 (기독교 이단 웹툰)

바잇 카탄 2024. 10. 24. 13:36

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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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이네 상황은 우리 교단 내에서도 극단적인 사례이지만,
우리 교단의 교리로 인한 학대 합리화는 모든 가정 내에서 겪어봤을 일이라고 생각된다.
심지어 훈육 뿐 아니라 양육에 전반적인 문제를 겪는다.
얼핏 보기에는 아무 문제 없어 보이지만...
일단 기본적으로 교회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기에 기다려야 하는 시간, 조용히 해야 하는 시간이 많다.
물론 시간이 지날 수록 엄마의 교회 생활을 더 기다릴 줄 아는 아이가 되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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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이단에서 부모가 교회 일을 하기 위해 아이들과 떨어져 있어야 하는 상황을 무엇에 빗댈 수 있을까? 예수께 아이들이 나아올 때 제자들이 가로 막았던 것과 비슷할 것이다. 마태복음 19:13-15절, 마가복음 10:13-16절, 누가복음 18장 15-17절에서, 사람들은 예수께서 아이들을 만져주실 것을 기대하고 자녀들을 모임에 데리고 왔다. 이 아이들은 "브레포스(βρέφος; 일반적으로 갓난 아이나 영유아)" , "파이디온(παιδίον; 어린 아이, 아동)" 등으로 묘사되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어린 나이의 아이부터 성경을 듣고 이해할 정도의 아동까지 다양했을 것으로 보인다.

 

유대 공동체에서는 대속죄일 저녁에 장로들이나 율법 교사들과 같은 종교적 지도자나 선생들이 사람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 기도를 올리곤 했다. 아마 아이들을 데려온 부모들도 이런 축복 기도를 예수님께 받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자리에서 이런 쓸데 없는 일을 함으로써 시간이 낭비되고 모임이 방해 받는 것을 싫어하였다. 아이들한테 축복 기도를 주는 것보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앉아서 듣고 교제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지 않겠는가? 그런 사소한 일 때문에 더욱 중요한 일이 방해 받는다는 것은 제자들이 보기에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게다가 이것을 한 번 허용해주면, 앞으로 어린 아이들이 나타날 때마다 예수님께서 귀찮아지실 것이 틀림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아이들을 막아 섰다. 그리고 그런 행동을 하는 부모를 꾸짖었다. 헬라어 동사 "에피티마오(ἐπιτιμάω)"는 "비난하다, 꾸짖다"의 의미가 있다. 제자들은 이와 같은 행동으로 예수님의 중요한 일을 망치려고 한 부모들을 비난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거리에 등장할 때마다 정말 많은 인파가 몰려 들었을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보고, 대화하고, 병 고침을 받으려는 사람들은 정말 많았다. 그런데 고작 "애들을 만져 달라고" 나아 오다니! 이 부모들은 뭐가 더 중요한가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 같이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어린아이들을 용납하신다. 누가복음 18장 16절에는 이것이 더욱 구체적인 행동으로 묘사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아이들을 불러서 초청하셨다("προσεκαλέσατο"). 그리고 나서 제자들에게 아이들을 용서하고 허용하라고("Ἄφετε") 말씀하셨다. 그리고 아이들을 방해하지 말라고("μὴ κωλύετε αὐτά") 또한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 아이 같은 사람들의 소유이기 때문이다("τῶν γὰρ τοιούτων ἐστὶν ἡ βασιλεία τοῦ θεοῦ."). 이 헬라 문장에서 소유격이 사용되고 있는 것에 주목하라.

 

지금 누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향한 모임을 방해하고 있는 것인가? 예수께 나아오는 아이들인가, 아니면 아이들을 가로 막은 제자들인가? 예수님의 판단은 후자가 하나님을 위한 일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는) 진정으로 어린 아이들을 사랑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헬라어 동사 "콜뤼오(κωλύω)", 즉 "방해하다, 막다"가 사용된 것은 결정적으로 제자들이 예수님의 사역을 오히려 방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제자들은 용서하고 허용하는 부드러운 사랑의 태도를 가지지 못했다는 문제점이 있다. 그들은 어린 아이들이 예수께 다가오는 것을 매우 불편하게 생각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 보다 엄격한 잣대를 들이미는 것이 더욱 우선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아이들의 철부지 같은 모습들을 보면서 불쾌해 하고 비난할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그런 모습들 까지도 용서하고 허락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복음서 저자들은 매우 의미심장하게도 신약성경에서 "용서하다"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헬라어 동사 "아피에미(ἀφίημι)"를 통해 아이들을 용납하라고 묘사한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아이들의 철 없음을 용서하고 허락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린 아이들과 같은 자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대목에서, 아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 느껴진다. 예수님은 언제나 가난하고, 비천하고, 상처 받고, 나약하고, 어린 자들에게 부드럽고 허용적이며 따뜻하게 대하셨다. 이런 자들에게 복이 있으며(팔복설교), 이런 자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에 어울린다. 심지어 어린 아이들이 스스로 나아 온 것이 아닌, 부모의 손에 이끌려 나아 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아이들을 만져주시고 사랑해주시길 원하셨다. 예수께서는 참으로 이런 자들을 찾아가신다. 

 

혹자는 예수께서 다만 천국이 어떤 자들에게 어울리는가를 설명해주시기 위해서만 아이들을 용납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눅 18:17). 곧 이런 본문들은 복음을 어린 아이와 같이 믿으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만 기록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그랬다면 예수께서 이 모든 말씀을 하시고 실제로 아이들에게 일일이 안수해 주신 것은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마 19:15)?

 

심지어 마가복음 10장 16절은 이것을 더욱 세밀하고 또 친밀하게 묘사한다. 곧 예수께서는 아이들 머리 위에 안수하셨을 뿐만 아니라, 아이들을 실제로 안으셨다("ἐναγκαλισάμενος"). 헬라어 동사 "에나칼리조마이(ἐναγκαλίζομαι)"는 마가복음에서만 두 번 사용되었는데, 모두 아이를 안는 장면에서 사용되었다(막 9:36; 10:16). 이 동사는 두 팔로 어떤 대상을 가슴 안에 넣는 동작을 나타낸다. "에나칼리조마이"는 명사 "앙칼레(ἀγκάλη; "팔", "arm")"에서 유래하였다. 그리고 이 명사는 누가복음 2장 28절에서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안는 장면에서 한 번 사용된다.

 

이것은 예수께서 실제로 아이들을 두 팔로 안아 주시고 한 명 한 명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시는 정말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장면을 우리에게 생생하게 전달해준다. 아마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어쩌면 제자들은 이 날 그들이 생각했던대로 본래 진행했어야 할 모임의 시간을 아주 많이 뺏겼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대신 아이들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 자체가 감동적인 예배의 현장이 되었다. 아이들은 마땅히 사랑 받아야 할 대상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런 사랑을 차고 넘치게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필자는 교회가 아이들을 위한 활동을 많이 늘려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이들과 부모가 함께 하는 활동과 시간을 더 늘려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A이단은 아이들을 데리고 야외 교제를 가는 등의 노력을 자신들이 하고 있다고 말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필자가 보기에 더욱 상황을 악화시킨다. 아이들은 부모와의 시간이 정서 발달과 사회성 발달, 그리고 교육의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소아과적인 상식에 해당한다. 아이들과 부모가 따로 찢어져서 모임을 갖고 예배를 드리는 것은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 부모와 아이가 함께 있는 예배가 필요하다. 

 

또한 A이단에서 (비교적 최근까지도) 모임 시간에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는 상황들이 매우 많이 있었다. 어떤 모임은 실제로 아이들이 떠들지 않아야 하고 조용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어야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런 모임들에는 어린 자녀를 둔 부모들이 참석하지 않고 빠져도 되도록 허용해 줘야 할 것이다. 구역모임이나, 전도집회 등 아이들이 조용히 해야 하는 시간에는 그런 아이를 둔 부모들이 참석했을 때 교회는 그런 부모들에게 "아이를 돌보러 가보시라"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A이단의 분위기는 그렇지 않다. 필자는 갓난 아이를 안고 구역모임 등에 참석하는 어머니회 자매들을 정말 많이 보았다. 그리고 비교적 최근에도 그런 상황들을 정말 많이 보게 될 기회가 있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아이들은 잘 울지 않고, 잘 반응하지 않고, 정말 조용하게 있었다. 왜냐하면 아이가 울 때마다 부모가 계속 조용히 하라고 부정적인 피드백을 지속적으로 제공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아이에게 정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아이들은 의사 표현이 자유로워지고 자신의 감정을 잘 받아들이기 전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의사소통을 시도한다. 대개 어린 아이들의 경우 그것은 우는 것이다. 그리고 부모는 아이의 우는 소통 방식에 적절한 반응(피드백)을 주는 것으로 아이의 정서 발달을 돕고 불안 요소를 잠재운다. 긍정적인 좋은 피드백을 지속적으로 받은 아이는 자신의 감정을 잘 다스릴 줄 알고, 부모를 신뢰하며 안정적인 심리를 갖고 자란다. 

 

그러나 아이의 소통 방식에 계속해서 응답이 없거나, 아니면 "쉿, 조용히 해" 등과 같은 부정적 피드백만을 제공한다면 아이는 어느 순간 부터 자신이 원하는 것이 있어도 부모는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을 학습하게 된다. 이 경우 아이는 모종의 심리적 포기를 경험하게 되는데, 결국 부모에게 별로 기대하는 것이 없는 아이로 자라난다. 이런 아이는 일면 조용하고 차분하며 소위 "순한 아이"로 보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마음 속에는 부모에 대한 기대와 의존이 없고, 불안정한 상태가 남아 있게 된다. 실제로 우리는 이런 아이들을 보육 시설 등에서 직접 만나 볼 수 있다.

 

그래서 A이단에서 오래 자란 아이들은 부모와 별로 친하지 않은 경우들이 많다. 애초에 주말에도 부모와 보내는 시간이 적기 때문이다. 평일에는 유치원이나 학교에서 시간을 보내고, 주말에는 교회에서 부모와 떨어져 지낸다. 이런 아이들이 정상적으로 크길 바란다면 그것은 욕심이다. 그럼에도 A이단의 부모들은 아이들이 "그리스도인 가정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잘 크길 바란다. 부모와 아이가 별로 보내는 시간이 적은데 무슨 그리스도인 "가정"인지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교회는 아이와 부모가 주말에 보내는 시간을 보장해줘야 한다. 부모가 오후 늦게까지 봉사에 시간을 쏟고 있다면, 교회 차원에서 이런 것들을 하지 못하도록 권장하고 자녀들과 오후 시간에는 시간을 함께 보내라고 놓아줘야 한다. 혹은 교회가 아이들과 부모들이 함께 하는 놀이 시간을 조직하거나, 주말의 놀이 비용을 지원해 주는 것도 좋다. 어떤 방식이든 교회는 부모를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만들고, 그 사랑을 자녀에게 적절히 줄 수 있는 시간과 여건을 만들어줘야 할 의무가 있다. 필자는 그것이 하나님 나라 확장의 또다른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말씀을 듣고 봉사를 하는 것보다,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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