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보다 성서신학적인 글을 쓰겠다고 말한대로, 이번에는 교리적인 것 보다 성서신학과 관련된 책을 리뷰해 보고자 한다. 예루살렘의 히브리 대학 석좌 교수인 이스라엘 크놀(Israel Knohl)의 저서, 『מאין באנו(The Bible’s Genetic Code)』이다. 한국어로는 『신의 설계자들』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이 책은 아마 내 블로그에 기존에 찾아오던 분들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책일 것이다. 상당히 아카데믹하기 때문에, 보수적인 신학을 가진 분들에게는 매우 충격 먹을 만한 내용을 많이 담고 있다. 저자는 유대인이며 이스라엘에 실제로 거주하고 있지만, 성경 자체를 거룩한 신의 책으로 여기기 보다는 비평적인 입장에서 접근하여 분석한다. 즉, 세간에 퍼져 있는 표현을 좀 사용하자면, 일반 기독교인들이 보기에 이 책은 다분히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물론 나는 그런 표현이 성서신학의 범주와는 다른 범주를 가리키는 용어라고 생각한다.)
한 가지 염두 하여야 할 것은 이스라엘 크놀과 같은 학자는 성서신학, 특별히 구약학에서는 매우 저명한 학자라는 것이다. 학자들의 필드에서는 이렇게 급진적으로 보이는 학설이 성서를 설명하는 설득력 있는 가설로 자리매김하기도 한다. 필자의 생각에 특별히 독일이나 이스라엘의 학자들의 경우에 좀 더 이런 경향성이 나타나는 것 같다. 반면에 영미권 학자들은 복음주의 성향을 지닌 경우가 더 많다.
그러므로 이 책은 복음주의적인 신학에 머물고자 하는 분들에게는 추천하지 않는다. 넓게 보자면 필자 역시 복음주의 신학에 보다 공감하고 있기 때문에 이 책에서 주장하는 내용들은 필자의 견해와 부합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필자가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 번 불편한 감정을 느낀 것은 아무리 성서신학과 관련된 책들을 읽는다고 하여도 아직 필자의 신학적 스펙트럼은 그렇게까지 급진적이지 않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책을 리뷰하는 이유는 필자가 이 책을 매우 재밌고 흥미롭게 읽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학술적인 가치를 생각할 때 이 책은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핑켈슈타인 등의 최소주의 학자들의 주장을 다루기도 하고, 고고학적인 발견과 관련된 가설들을 비교 분석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학자로서 할 수 있는 적절한 결론을 내리고 있기도 하고 말이다.
만약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성서신학에 대해 잘 모르고, 관심도 없으며, 복음주의의 입장을 유지하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면 이 글은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리뷰하는 책 역시 불쾌감만을 제공할 뿐일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색다른 해석과 독창적인 가설을 좋아하며, 성서신학에 대한 거부감이 없고 관련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에서 다루는 내용들이 매우 흥미진진할 것이며, 어쩌면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정체성 자체에 대한 당신의 시각의 패러다임을 바꾸게 될 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추천하는 편이며,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에 대해 성경의 설명을 문자적으로 수용하지 않는 학자들의 설명이 궁금한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책은 상당히 맵기 때문에 자신의 신앙이 흔들릴 것이 우려된다면, 이 책 뿐만 아니라 필자가 지금 쓰는 이 글도 읽지 않는 것이 좋다. 즉, 이번 글은 소위 ‘불량 식품’에 대해 다룬다. 이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조용히 뒤로 가기를 눌러 얼른 도망치라.
저자: 이스라엘 크놀
제목: 신의 설계자들
번역: 정예중
출판사: PCKBOOKS
가격: 16,800
215 페이지.
신의 설계자들
이스라엘크놀의 책
www.google.com
레위인의 편입: 출애굽 사건
이 책을 읽기 전에 사전 지식으로 먼저 알고 있으면 좋을 만한 것으로는, 구약학자들 중에 이스라엘 민족을 어떤 단일 민족으로 여기지 않는 학자들이 상당히 많이 있다는 것이다.
보통 일반 기독교인들의 경우 성경에서 말하는 역사 기술로 보이는 서순을 따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계보로 내려오는 유전적으로 구분된 민족을 이스라엘 사람이라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많은 구약학자들은 그러한 견해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성경을 유심히 읽어보면 아브라함은 수메르의 수도인 우르 출신이었으며 성경의 기록을 문자 그대로 수용한다고 해도 아브라함은 엄밀히 말해 ‘이스라엘인’이 아닌 수메르인에 가깝다.
더욱이 성경은 초기부터 여러 민족들의 혈통이 결혼을 통해서나 아니면 편입을 통해서 뒤섞이는 것을 묘사한다. 예를 들어 여호수아와 함께 싸워 유다 지파의 땅을 차지했던 갈렙의 경우 그나스(קְנַז) 사람이었으나 후에 유다 지파에 편입된 사람이었다. 또한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 때에 그들의 족장 공동체에 순수한 이스라엘 민족들만 있었을 수는 없으며 (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으니) 여러 민족들이 함께 거주하고 이동했을 것이다. 심지어 이스라엘 민족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거주하기 시작한 여호수아 이후에도 이스라엘인들은 여러 민족들과 함께 어울려 살았던 것으로 성경은 묘사한다.
그러므로 정직하게 말하자면 ‘이스라엘 민족’이란 유전적인 요소로 결정되는 것이 (적어도 초기에는)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오히려 이스라엘 사람이 되는 것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종교적인 이유였을 것이다. 즉, 이스라엘 민족을 유전적 공동체가 아니라, 야훼를 중심으로 하는 신앙 공동체로 여기는 것이 더욱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이런 구약학적인 배경 지식을 먼저 알고 있다면 지금부터 이 책에서 이스라엘 크놀이 주장할 가설에 대해 조금 거부감이 덜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크놀은 레위인들을 다른 이스라엘 민족들과 같은 혈통인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크놀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세와 함께 출애굽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고고학적인 발견들을 고려한다면 꽤나 설득력 있는 가설이긴 하다. 고고학적으로 성경이 묘사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과 같은 민족적 대규모 이동을 설명하는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또한 당시 이집트나 여타 다른 국가 및 도시국가들의 일반적인 인구수를 생각한다면 출애굽의 장정 약 60만의 숫자가 이집트 내에 있었다는 이야기는 현실적이지 않다.
그래서 크놀은 이집트의 힉소스 왕조의 몰락 이후 그다지 많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이집트를 빠져나왔을 가능성에 더욱 무게를 둔다. 그리고 아마도 그들이 훗날 ‘레위인’이라 불리게 될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레위인들이 이스라엘 민족들 내에서 땅을 소유하지 못한 채 거주하게 된 것의 이유를 설명하는 것일 수도 있다. 만약 레위인들이 뒤늦게 이스라엘 공동체 안으로 편입된 것이 맞다면, 레위인들이 토지를 소유하지 못하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미 이스라엘 공동체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크놀은 유독 레위인들의 계보에서만 이집트식 이름이 유행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모세, 비느하스, 홉니, 므라리, 아론, 앗실 같은 이름들은 전부 이집트식 이름이다. 반면에 성경에서 이집트에 함께 있었던 것으로 묘사되는 다른 지파들의 계보에서는 이집트식 이름이 발견되지 않는다. 이것은 만약 전체 이스라엘이 이집트에 있었을 경우에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다.
자, 여기까지 읽었다면, 이제 이 책이 얼마나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는지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정도는 아직 새발의 피다. 더더욱 충격적인 내용이 뒤에 아직 남아 있다.
아직 늦지 않았다. 얼른 뒤로 가기를 눌러라.
미디안의 신앙과 북시리아의 신앙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성경이 묘사하는 기록 이외에는 여호와를 섬기는 신앙인 ‘야훼 신앙’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 무심코 상정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성경이 묘사하는 고대 세계는 이스라엘이 생겨나기 이전부터 이미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여럿 등장한다.
특별히 구약학에 대해 조금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고고학적으로 미디안 지역에서 야훼 신앙이 이미 존재했다는 증거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다른 구약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크놀 역시 야훼 신앙이 미디안 사람들에게 이미 있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야훼는 본래 산(mount)의 신으로 여겨졌으며, 미디안인들은 이 신의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미디안인들은 이 신의 형상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미디안의 야훼가 ‘산의 신’으로 섬겨졌던 것의 영향은 성경 열왕기상 20:23에서 그 흔적이 남아있다. 거기서 아람왕의 신복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신을 ‘산의 신(אֱלֹהֵ֤י הָרִים֙)’이라고 상정한다. 그러면서 만약 평지에서 싸운다면 이스라엘의 신을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추론한다. 또한 모세가 산에 올라가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에서 이런 점들이 도드라진다. 모세는 여호와를 산에서 처음 만났으며, 후에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 시킨 다음에도 산에서 율법과 십계명을 받는다.
출애굽기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익히 알고 있듯이 모세는 이집트에 있다가 미디안으로 도망가 거기서 대략 40년을 지냈다. 그리고 크놀의 설명대로라면 레위인들이 야훼 신앙을 갖게 된 것은 이런 배경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본래 미디안인이었던 자들이 야훼 신앙을 가진 채 이집트에 있다가 탈출했을 수도 있고, 혹은 모세와 같은 인물이 미디안에서 야훼 신앙을 배워왔을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크놀은 레위인들이 이러한 미디안의 신앙을 가지고 이스라엘로 편입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기존에 팔레스타인 지역에 거주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그는 어떻게 설명할까?
보통 구약학자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팔레스타인 지역 거주에 대해 여러 가설들을 제시한다. 여호수아서에 나온 대로 전쟁을 통해 급격하게 침입했다는 설, 기존에 팔레스타인 지역에 거주하던 농민들이 혁명을 일으켰다는 설, 외부에서 이주한 것은 맞으나 전쟁 없이 서서히 녹아들었다는 설 등등 그것은 다양하다. 확실한 것은 메르넵타 비문에 의하면 이스라엘 민족들은 그의 시기에 이미 팔레스타인 지역에 거주했다.
물론 많은 구약학자들은 고고학적인 이유로 팔레스타인 지역에 외부에서 이스라엘인들이 넘어와 정착했다는 것을 지지한다. 그것은 목깃 항아리 도자기 등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토기들이 특정 시기에 갑자기 폭발적으로 기존 토기들을 대체하였다는 등의 고고학적 증거들을 통해 유추 가능하다. 또한 해당 시기에 몇몇 도시의 성들이 폐허가 되고 이후에 인구가 갑자기 폭발적으로 증가한 양상이 관찰된다는 점도 이것을 지지하는 근거 중 하나다.
보수적인 구약학자들의 경우 이것을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차지한 것으로 설명할 것이다. 반면에 크놀은 창세기에 묘사된 흔적들을 통해 레위인을 제외한 기존 이스라엘 민족들이 아람 사람이었을 가능성을 열어둔다. 특별히 신명기 26:5에서는 야곱을 “유리하는 아람 사람”으로 소개한다. 이것은 이스라엘 땅에 거주하던 이들이 북시리아 지역에서 이주한 이주민들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
특별히 고고학적으로는 성경에서 “하나님”으로 번역된 “엘”이나 “엘로힘” 신앙이 가나안 지역의 우가릿의 신화와 많은 관련성이 있다. 우가릿 신화에서 엘은 만신전의 최고 신이며, 황소로 상징된다. 보다 아카데믹한 구약학자들은 이런 엘의 만신전에 야훼가 후에 편입되었다고 여기며, ‘야훼의 아세라’라는 고고학적인 기록이 이런 것들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물론 어떤 구약학자들은 그에 대해 반대하지만 말이다.
크놀 역시 만신전에서 야훼가 초기에 엘의 아들로 편입되었다고 여긴다. 즉, 미디안의 야훼 신앙을 레위인들이 가져와 북시리아에서 이주한 이스라엘 공동체에 들어가면서 기존의 ‘엘’ 신앙에 ‘야훼’ 신앙을 편입시켰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엘의 아들로 야훼가 섬김을 받았다가, 점점 엘의 자리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엘은 황소로 등장하는데 반해, 성경에서 야훼는 ‘송아지’로 등장한다. 그리고 송아지인 야훼가 황소 엘의 자리를 탈환하였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엘로힘-야훼’의 신앙이다.
성경에서 금송아지는 생각보다 자주 등장한다. 고대 근동의 이러한 신화적 배경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이스라엘 민족들이 시내산 앞에서 갑자기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숭배한 것을 보며 무슨 관련성이 있나 하고 의아해 할지도 모른다. 또한 여로보암이 북이스라엘을 건국하면서 금송아지를 다시 세운 것 역시 이런 배경에 대해 모른다면 제대로 설명되기 어렵다.
필자가 알기로 고고학적으로도 이스라엘의 제단의 형태는 우가릿 지역에서 발견되는 제단과 비슷한 모양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제단에 뿔을 박아 넣은 형태는 이스라엘의 신앙이 엘 신앙에서 파생되었거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요소일 수 있다. 크놀의 가설은 이런 배경에서 설득력 있는 면도 존재한다.
그리고 레위인들은 종교적인 융합과 우위를 통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 들어가면서 이스라엘 공동체 안으로 편입해서 들어갔을 것이다. 레위인들이 제사장을 맡고 신앙적인 모든 전례들을 집례하게 된 것은 이들의 이런 전략이 성공적이었음을 말해준다.
크놀의 가설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
이제 나름 복음주의 신학을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를 평가하는 필자의 부족한 시선으로 크놀의 매우 학술적인 글을 어떻게 다뤄야 할 지 잠깐 고민을 해보겠다. 인터넷에 이스라엘 크놀을 검색하면 크놀의 책을 읽고 충격을 먹은 기독교인들과 목사님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구약학에 대해 익숙하지 않은 분들이 처음 이 책을 접하고 상당한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크놀의 가설에 전부 동의하거나 무조건적으로 따를 필요는 없다. 오히려 크놀의 글에서 의미 있는 지점과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할 만한 설명만을 수용하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유익하다.
특별히 이스라엘 민족들이 단일 민족이 아니라 신앙 공동체였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이것은 성경이 직접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굳이 학술적인 내용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도 인정할 수 있어야 하는 부분이다. 이스라엘은 분명하게 여러 민족들이 신앙적 필요에 의해 모인 집단이었다. 물론 후에 이것이 혈통적인 면으로 굳어지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유전적인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에게 이것은 별로 거부감 없이 수용할 만한 진실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출애굽에서 레위인들이 나와 미디안의 신앙을 가지고 북시리아의 이스라엘 공동체에 편입되었다는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사실 필자는 이에 대해 어떤 평가를 할 만한 입장에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한 것 같다. 고고학적으로 미디안 지역에서 이미 초기에 ‘산의 신’이자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되고 형상을 만들어서도 안 되는 ‘야훼’라는 신을 섬기는 신앙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또한 이러한 야훼 신앙이 가나안 지역에 이미 존재하였던 ‘엘’을 섬기는 신앙의 용어와 형태들을 활용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마치 유대인의 신앙이 기독교를 통해 한국으로 건너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토착화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스라엘인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여호와라고 부른 것도 어쩌면 그들이 가나안 지역에 존재하였던 우가릿 신화나, 아람 지역의 유랑민이었던 야곱 계열의 신앙에 영향을 받은 탓일지도 모른다. 물론 필자는 크놀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레위인이 이스라엘에 편입되었다는 방식의 설명을 수용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신앙이 우가릿 신화의 용어나 표현들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점은 구약학을 공부해본 사람이라면, 그리고 히브리어 사전을 들춰본 사람이라면 인정할 만한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믿었던 신은 우가릿의 ‘엘’인 것인가, 아니면 미디안의 ‘야훼’인 것인가? 필자는 구약학자들의 연구물을 좋아하지만, 기본적으로 오직 한 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기 때문에 야곱이 믿었던 ‘엘로힘’과 모세가 계시를 받았던 ‘야훼’가 동일한 신이라고 믿는다.
어쩌면 하나님의 여정은 각 시대별 사회 문화적 배경을 활용해 점점 인류의 무지를 벗겨 나가는 과정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브라함 때에는 그것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수메르 신화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은 이집트 신화와 우가릿 신화였을지도 모른다. 모세가 계시를 받아 야훼 신앙을 통해 이런 신화적 잔재들을 큰 진통 없이 서서히 걷어 간 것은 아마도 하나님의 섭리였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등장으로 모세의 부족한 토라 체계가 드디어 극복된다. 그리고 인류는 폭력적이고 혼란스러운 신화적 세계관에서 문명화된 사랑의 세계관으로 크게 도약한다.
구약성경에 묘사된 이스라엘의 신앙을 모두 순수한 형태였을 것이라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성경은 이스라엘이 국가로서 왕정이 시작된 이후에도 여러 지역에서 하나님과 함께 우상이 함께 섬김을 받았다고 묘사한다. 하나님의 성전에는 여러 우상들이 만신전을 이루며 레위 제사장들에 의해 함께 숭배되었다. 그리고 성경을 기록한 기록자는 이것을 우상숭배라고 격렬하게 비판하지만, 반면에 이것이 매우 일상적이었으며 오랜 기간 유지되었다는 점도 그대로 기록한다.
그런 점에서 야훼 신앙이 우가릿 신화 등의 영향을 이겨내고 제 2성전기 유대교에서 유일신교로 굳어졌다는 것은 어쩌면 기적이었을 것이다. 신앙을 통해 장사하는 제사장들 입장에서는 신이 많을수록 좋다. 또한 신의 형상을 만들어 민중들에게 전시할 수 있으면 더더욱 좋다. 그런데 야훼 신앙은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 팔레스타인 지역을 집어 삼켰다.
우리가 크놀의 책의 실험적인 가설들을 너무 심각하고 진지하게 고려할 필요는 없겠지만, 세계적인 학자인 그가 자신의 가설을 전개시키기 위해 활용하는 여러가지 구약학의 학설들이나 고고학적 증거들에 대해서는 그리 간단히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구약학의 지식이 어느 정도 있는 사람들에게, 매우 흥미로운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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