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과 선물』, 존 M. G. 바클레이: 구원의 은혜와 옛 관점 및 새 관점

책 리뷰

『바울과 선물』, 존 M. G. 바클레이: 구원의 은혜와 옛 관점 및 새 관점

바잇 카탄 2025. 4. 30. 20:44

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반응형

이전에 필자는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을 소개하면서 E. P. 샌더스의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를 리뷰한 적이 있다. 이번에 리뷰할 책은 오랜 기간의 새 관점 논쟁에 어느 정도 종지부를 찍은 책이다. 바로 존 M. G. 바클레이의 『바울과 선물』이다.

 

필자는 이 책이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새 바울 관점에 대한 내용 때문에 그런 것만은 아니다. 구원과 관련된 전반적인 내용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를 이 책이 도와줄 수 있기 때문에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성서신학에 대한 아무런 관심이 없이 조직신학만 연구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이 책은 필수적으로 읽어야 할 정도로 중요하다.

 

필자의 블로그에 오는 모든 분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이 책을 읽는다면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라는 것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보는 좋은 경험을 할 수 있다. 특별히 대침 출신의 분들의 경우 구원을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을 수 있다. 이럴 때에 그런 경직된 사고관을 조금 말랑말랑하게 만들어 줄 기회를 이 책을 통해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이 점을 명심하면 좋다. 신약학자들은 자신의 신학적 배경에 따라 성경 본문을 그에 맞게 해석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 그런 틀에서 쉽게 벗어나는 경향을 보인다. 따라서 이 책을 읽을 독자 분들이 사전에 가지고 있는 조직신학적 관점과 이 책이 말하는 부분은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신약학자들은 비교적 그런 틀에서 자유롭다.  왜냐하면 성경은 기본적으로 조직신학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은 체계적인 책이 아니다. 복잡하고 어려운 책일 수는 있지만 체계적이진 않다. 무 자르듯 명확하게 딱 정확하고 모든 상황과 조화되는 교리를 명쾌하게 제시하는 것과 성경은 멀다. 오히려 우리가 사는 복잡다단한 세계를 그대로 반영하여 보여주는 모호한 책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단순 명쾌하지 않고 예측하기 어려운 불확실함이 어느 정도 존재한다. 그리고 성경은 이런 부조리한 세상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책이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구원론 역시 성경 본문을 보면 이미와 아직의 긴장 아래에, 종말론적 긴장 안에, 확신과 의심의 줄다리기 사이에, 확실함과 불확실함의 간극 사이에 존재한다. 믿음이 언제나 선명한 것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성경의 용어를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범위로 정리하고자 한다. 이런 작업은 분명 필요하다. 그러나 성경이 그런 범위로 모두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그런 범주에서 많이 벗어나 있을 수 있다. 심지어 전통적 구원관과 새 관점의 구원관의 두 가지 경로 모두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책이다. 이 점을 미리 알고 이 책을 읽는다면 더욱 도움이 될 것이다.

 


 

 

바울과 선물 정면 표지
『바울과 선물』

저자: 존 M. G. 바클레이
제목: 바울과 선물
번역: 송 일
출판사: 새물결플러스
가격: 55,000
1095 페이지.
 

바울과 선물: 사도 바울의 은혜 개념 연구

www.google.com

 

 

 

 

선물의 상호 교환과 보답의 의무


은혜는 특히 종교개혁 이후 매우 중요한 교리이다. 행함이냐 믿음이냐, 공로냐 은혜냐, 이에 대한 논의들은 기독교 신학을 다룰 때에 가장 근본적인 핵심을 담당한다. 아마 기독교 세계의 책들을 모두 살펴본다면 은혜에 대한 저술들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은혜는 개신교인의 입장에서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최후의 보루와 같다.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가 결정적으로 결별하게 된 원인이 되는 교리이며,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칼빈주의 진영에서 정죄한 이유이기도 하다. 존 웨슬리가 조지 휫필드와 싸운 것도 은혜 교리와 관련이 있다. 그리고 현대에는 바울에 대한 옛 관점 학자들과 새 관점 학자들 간의 분쟁의 원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은혜곧 선물이라는 것이 고대 사회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연구가 미흡했던 것 같다. 대부분의 신약학자들은 자신이 연구하는 문헌, 이를테면 제 2성전기의 유대 문헌이나 기독교 문헌들, 아니면 신약성서 본문들에 국한하여 자신의 이론을 펼쳤다. 조직신학자들이라면 그들이 따르는 교단의 전통적인 신학에 맞는 범주 안에서 이것을 다루었다.

 

하지만 각자의 다른 학문적 필드 아래에 서로의 용어에서 차이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성서신학의 용어를 사용하는 학자는 조직신학의 용어에 대해 전문적으로 알기 힘들다. 마찬가지로 조직신학의 용어를 사용하는 학자라면 성서신학의 용어들이 때론 불쾌하고 자유주의처럼 보일 것이다. 같은 용어-은혜나 선물과 같은 용어를 두고도 다른 학문의 분야를 다루는 학자들이라면 이것을 다르게 해석하고 사용할 것이다. 일종의 언어게임이 진행되는 셈이다.

 

그래서 은혜와 관련된 논쟁들을 살펴보면 각자가 그 용어에 대해서 이해하고 어디까지 범주를 설정할 것인가에 대해 다르게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로의 맞지 않은 관점을 같은 용어로 표현하다 보니, 오해가 생기고 분쟁이 발생되며 제대로 된 토론이 되기 힘들다. 무엇보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실제 그 용어의 무엇인가라는 부분을 파악하기가 어려워진다.

 

바클레이는 이런 어려움들을 근원적인 수준에서부터 해결하고자 마음을 먹은 것 같다. 이 책은 흥미롭게도 시작에서부터 선물이라는 용어가 고대 사회에서 무슨 의미를 담고 있었는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주로 사용되었는가를 설명한다.

 

먼저 그는 신학자들이 별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던 인류학자들의 견해를 파고든다. 인류학의 연구들은 오랜 시간 동안 적립되어 변화를 맞은 선물개념 이전의 보다 원시적이고 고대의 선물개념을 우리에게 보여줄지도 모른다.

 

이런 연구들에서 바클레이가 주로 주목한 것은 현대의 선물 개념과 고대의 선물 개념 간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선물을 흔히 대가 없이 주고 받는 것으로 정의하고 그렇게 생각한다. 선물을 주는 사람은 어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선물을 준다. 또한 선물을 받는 사람도 그것을 되갚을 생각을 별로 하지 않고 감사함으로 그것을 받는다. 이 같은 생각은 기독교인들의 경우에 쉽게 가지고 있고 자주 말하는 것들 중 하나다. 특별히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설명할 때 선물에 대한 우리의 이런 생각들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이 같은 선물 개념이 생겨난 것은 중세 시기에 이르러서 였다. 그 이전에는 이런 개념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기독교인들이 관심 있어 하는 신약성경의 배경인 그리스-로마 세계의 경우에는 현대의 이런 선물 개념과 완전히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바울과 선물 옆 표지

 


 

그리스-로마 세계의 선물을 간단하게 정의할 수 있다면 그것은 ‘상호 교환과 의무의 관계’일 것이다. 고대인들은 선물을 아무런 대가 없이 주고 받는 것으로 절대 생각하지 않았다. 선물이란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일종의 상호 호혜의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었기에, 선물을 받는 사람 편에서 그 선물에 대해 보답해야 할 의무가 발생하였다.

 

또한 선물을 주는 사람도 아무런 부담 없이 선물을 주지 않았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선물을 준다는 것은 그 대상과 자신 간에 상호 의무적 관계가 발생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선물을 주는 사람 자신의 지위와 명예와도 큰 관련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만약 지위가 높은 사람이 사회적으로 평판이 좋지 않은 사람, 사람들이 악하다고 비판하는 사람에게 선물을 주게 된다면 이것은 그 자신의 명예를 수치스럽게 하는 행동이었다. 그러므로 선물을 주는 사람은 대개 자신의 명예와 품위를 손상시키지 않을 대상에게 선물을 주고 싶어 했다.

 

마찬가지로 선물을 받는 것도 그러하다. 제아무리 좋은 선물, 가치가 있는 선물이라도 그것을 주는 사람이 사회적으로 평판이 좋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 선물을 받는 것은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런 사회적 평판이 엉망인 사람에게 (매우 수치스럽게도) 자신이 보답해야 할 의무가 생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대인들은 아무 선물이나 부담 없이 받지 않았다. 자신에게 선물을 주는 사람과의 관계를 생각해서 선물을 받았다.

 

만약 선물을 받고 나서 아무런 보답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이것은 사회적으로 매우 부끄러운 일이며 자신의 명예를 더럽히는 수치스러운 일이 된다. 이전에 필자가 썼던 글들에서 말했던 것처럼 로마 사회는 명예가 자신의 생명 보다 소중했다. 명예를 위해서라면 위협을 무릅쓰고 산과 바다를 누볐으며 전쟁에 참여하고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왔다. 로마인들은 모두가 영웅이 되고 싶어했다. 때로는 자기 집안의 명예를 위해 가문끼리 전쟁을 벌여 로마 시내가 피로 얼룩지기도 했을 정도다.

 

그러므로 선물을 받고 나서 보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것은 사회적인 고귀한 의무이자 모든 사람들의 마땅한 도리이다. 고대인들은 선물을 받고 감사하고 끝! 이런 생각을 도무지 보여주지 않는다.

 

명예 문화

 


 

특히 이런 선물의 보답의 의무는 로마에 있었던 후견인 제도와 결합하여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 로마에서는 어떤 부유하고 지위가 높은 명예로운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사람을 양자로 들이고 후원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것이 바로 후견인 제도이다. 이러한 관계에 들어간 사람들은 위의 선물 개념이 보여주는 상호 호혜의 관계가 더욱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또한 어떤 사람의 피후견인이 되는 사람은 그 사람의 후원을 받으며 같은 영향력 안에 들어가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누구의 후원을 받느냐가 그 사람의 고귀함을 결정했다. 이름 있는 가문의 후원을 받는 사람이라면, 사회적으로 매우 고귀한 신분일 것이다. 만약 로마 황제의 후원을 받는 사람이라면,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들이 성경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신약성경이 사용하는 헬라어 용어들 때문에 이런 문화와 풍습과 제도들이 성경과 관련이 있다. 성경의 용어들은 그리스 로마 세계의 전형적인 것들을 자주 보여준다. ‘선물’, ‘양자’, ‘제국’, ‘구원자등등은 당시 그리스 로마 세계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용어들이었다.

 

이제 잠시 위의 선물 개념과 로마 후견인 제도를 우리 기독교와 관련하여 생각해보자. 우리는 메시아 예수를 통해 천상 제국의 황제인 하나님의 양자로 들어간다. 이것은 황제 하나님과 우리가 일종의 후견인 관계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후원 받는 입장에 있는 셈이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지위를 갖게 된다. 바로 하나님으로 대표되는 고귀한 품위와 명예의 지위이다. 그렇다면 이 선물은 공짜인가? 아무런 대가 없이 우리는 이 선물을 그저 누리기만 하면 되는가? 그렇게 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배은망덕한 행동이다. 선물을 후원하시는 황제 하나님께, 그분의 양자인 우리들은 마땅히 보답의 의무를 갖는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며, 바람직한 일이고, 권장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란 평생의 삶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그분의 양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바클레이 약력

 

 


 

은혜의 6가지 극대화와 해석들


이제 바클레이는 눈을 고대의 선물 개념에서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선물의 개념, 및 제 2성전기 유대인들과 기독교 신학자들이 말하는 은혜의 개념으로 돌린다. 성경을 다루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말할 때 서로가 생각하는 은혜의 범위와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대화를 할 때에 각자가 주장하는 바가 맞지 않고 오해가 발생하게 된다. 바클레이의 작업은 이제 이 은혜에 대한 용어를 분석하여 정리하는 것이다.

 

그는 은혜를 말하는 문헌들을 분석한 다음 학자들이 말하는 은혜의 특징을 6가지로 분류한다. 그는 이것을 은혜의 여섯 가지 극대화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은혜의 이런 특징들이 선물이라는 개념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것은 아니며, 논리적 추론을 통해 그 개념을 극대화 시킨 뒤에서야 납득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간략하게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초충만성(superabundance). 이것은 선물의 완전성, 충만성, 포괄성을 말한다. 즉 하나님의 은혜가 매우 충만하고 그 크기에서 굉장히 크다는 것이다.

 

2. 단일성(singularity). 이것은 하나님의 속성과도 관련이 있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순수한특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필론이 다음과 같이 주장한 바와 같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선물들의 근원이 악한 것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악하다고 여겨지는 것으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한다.” 하나님의 선물은 언제나 선하다는 단일한 특성만을 지닌다.

 

3. 우선성(priority). 이것은 선물의 수여가 수혜자의 요구보다 언제나 앞선다는 것이다. 교리적으로 말하자면 예정론의 교리에 가장 가까운 특징일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은혜는 어떤 조건에 의해 불러와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조건에 앞서 존재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은 모든 좋은 것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언제나 시작점이다. 우리가 바라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찾아온다.

 

4. 비상응성(incongruity). 고대 사회에서는 선물을 차별적으로 주었다. 선물을 받는 수혜자의 상태에 맞게 선물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벗어난 것이 바로 비상응성이다. , 수혜자의 상태와 선물의 가치는 상응하지 않는다. 쉽게 말해, 우리의 죄 있는 악한 상태와 무관하게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진다. 우리가 무가치할 때, 우리에게 선물이 주어지는 것이다.

 

5. 유효성(efficacy). 고대 사회에서 선물은 보답의 의무를 지게 만들었다. 이 효과를 가장 효력 있게 만드는 특징을 유효성이라고 말한다. , 선물의 원래 의도를 충분히 성취하는 선물인 셈이다. 하나님을 믿는 그의 백성은 그 은혜의 효과로 인해 성화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다. 그의 선물은 인간을 바꿀 수 있는 효과가 있다.

 

6. 비순환성(non-circularity). 이 특징은 현대의 선물 개념에서 파생된 것이다. , 선물은 호혜성과 무관하고, 교환 및 보답의 의무와 무관하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보답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물은 어떤 대가와 답례를 바라지 않는다.

 

이 특징들을 열거한 후, 이제 바클레이는 이것에 따라 기독교 사상가들의 견해들을 하나하나 분석하기 시작한다.

 

은혜의 6가지 극대화

 


 

마르시온주의 이단의 창시자 마르키온은 자신이 가진 영지주의 이원론의 개념에 따라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구약성경은 필요 없다고 선언했다. 따라서 그는 은혜에서 단일성을 매우 극단적으로 강조한 사람이다. 또한 그는 비상응성 역시 강조하여 이렇게 선한 하나님의 은혜가 무가치한 자들에게 주어진다고 주장했다.

 

우리에게 예정론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는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은혜가 대상이 바라고 요구하는 것 보다 언제나 앞선다는 우선성과, 대상의 가치와 무관하게 은혜가 주어진다는 비상응성을 강조하였다. , 그에 의하면 은혜는 정의상 공로보다 앞설 뿐만 아니라 죄인에게 주어진다. 또한 그는 은혜가 헛되이 주어지지 않고 인간의 인격을 움직일 힘이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우리는 그에게서 유효성 역시 확인할 수 있다.

 

종교개혁의 주역인 마틴 루터는 로마 가톨릭의 공로에 대한 모든 신학을 혐오하여 거부하였다. 아마 루터의 은혜의 극대화는 현대 기독교 신자들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을 것이다. 그의 주장에는 은혜의 초충만성, 단일성, 비상응성 등이 나타난다. 반면에 그는 은혜의 유효성을 별로 강조하지 않았으며, 은혜가 값없이 주어지기 위해서는 비순환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별히 바클레이는 루터의 이러한 비순환성을 강조한 부분에 주목하는데, 루터의 이러한 강조는 성경이 기록되던 시기의 선물 개념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장로교와 개혁주의를 시작하게 만든 칼뱅은 아우구스티누스와 루터의 영향을 크게 받아 그들의 사상을 더욱 전개 시키고 예리하게 다듬었다. 칼뱅은 은혜의 우선성을 특히 강조하는 신학자이다. 또한 그는 비상응성을 강조하지만 단일성은 강조하지 않는다. 루터와의 가장 큰 차이점은 칼뱅이 순종의 필연성을 주장하면서 은혜의 유효성에 집중했다는 것이다. 또한 괄목할만한 것으로는 칼뱅은 사회적 의무와 연대를 설명하면서 은혜가 비순환적이라 여기지 않는다는 점인데, 칼뱅에게 있어 은혜를 받은 수혜자인 인간은 하나님을 향한 순종과 의로움을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여줘야 할 의무가 있다. 이 점에서 그는 루터와 달리 비순환성에 반대한다.

 

이후로 바클레이는 신정통주의 현대 신학자들인 칼 바르트, 루돌프 불트만, 에른스트 케제만, 루이스 마틴의 은혜 개념을 분석한다. 또한 그는 이 책을 쓰게 된 이유인 샌더스 및 바울에 관한 새 관점 학자들의 은혜 개념 역시 다룬다. 그러면서 그는 새 관점 학자들이 은혜의 이러한 극대화들을 분류하여 분석하는 데에 실패했으며, 이것들을 혼동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특별히 새 관점 학자들이 유대 문헌들을 살펴보면서 은혜의 극대화 중 일부의 특성이 보이는 것을 두고 기독교와 유대교 간에 큰 차이가 없다는 식으로 묘사하는 것에 대해 바클레이는 총체적으로 비판한다.

 

 

 

제 2성전기 유대 문헌과 사도 바울


오히려 유대 문헌들을 살펴보면 유대인들은 기독교 학자들과 달리 비상응성을 그다지 강조하지 않는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은혜를 받을 만한 사람에게 주어진다고 생각했다. , 의인에게 하나님의 은혜, 선물이 주어질 것이다. 따라서 선물을 받는 수혜자의 가치와 선물은 무관하지 않다. 물론 유대 문헌들 중에도 비상응성을 보이는 듯한 것들이 존재하긴 한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유대교는 비상응성 보다 다른 은혜의 극대화들을 강조한다.

 

샌더스가 분석한 유대 문헌들 외에도 바클레이는 전반적인 제 2성전기 문헌들을 철저하게 분석하며 은혜의 극대화 용어를 그들이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밝혀낸다. 그리고 이런 극대화들이 강조하고자 하는 신학적 필요에 따라 제각기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도 낱낱이 보여준다. 그러므로 한 가지 극대화가 등장한다고 해서 다른 극대화가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은 아니다. ‘은혜라는 용어 안에 이런 특징들이 모두 필연적으로 도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클레이는 뒤이어 이 책의 가장 메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도 바울의 저작들(신약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사도 바울의 저작성을 인정하는 것들)을 다룬다. 그가 보기에 사도 바울의 저작들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은 은혜의 ‘비상응성’이다. 바울은 은혜가 수혜자의 가치와 무관하게 주어진다는 것을 매우 강조한다.

 

또한 그는 은혜의 유효성도 말한다. 바울이 보기에 하나님의 은혜는 헛된 것이 아니다. 그 은혜는 수혜자들이 주어지는 선물을 받기에 걸맞는 사람으로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이끌어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래서 바울은 은혜의 비상응성을 강조하면서도, 신자들이 그 선물에 부합하는 지위를 얻어갈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에게는 이러한 선물의 완성이 매우 중요하다.

 

의로운 것은 구원 받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바울은 비순환성을 지지하는가? 고대 선물 개념에 대해 바클레이가 연구해서 보여주는 바대로, 바울은 고대인의 시각에서 선물의 개념을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비순환성을 지지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사도 바울의 서신들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여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라는 명령들이 자주 등장한다. 바울과 그의 동시대인들에게 신의 제국의 황제 하나님의 후원을 받는 그의 백성들이 이런 의무와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매우 당연한 것이었다.

 

성경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순환성을 긍정한다는 사실은 현대의 기독교인들에게는 사뭇 낯선 개념이다. 루터의 전통에 강한 영향을 받는 사람이라면 이런 결론이 매우 거북할 지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사람들은 은혜에 대하여 값없이 받는다라고 말할 때 이 말에서 순환성까지 제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바울에게 이 '값없이'라는 말은 비상응성을 표현하기 위한 말이었다고 우리가 여기는 것이 나을 것이다.

 

동시에 바울이 유효성을 함께 강조한다는 점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바울이 말하는 선물에 대한 보답의 의무가 인간의 순수한 자력으로 가능한가에 대하여 우리는 회의적으로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칼뱅이 이 점에서 상당히 균형적인 관점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선물의 순환성을 긍정하는 동시에, 그 순환성을 가능하게 만드는 유효성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물론 그의 유효성은 아우구스티누스를 중심으로 하는 가톨릭이 말하는 정도까지 강조되지는 않지만 말이다.

 

하지만 종교개혁의 유산이나 신정통주의의 관점 모두에 대하여 바클레이는 비판의 끈을 놓지 않는다. 그들의 잘못은 사도 바울의 신학을 믿음-행함의 틀에 가두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이 비판하는 율법의 행위에서 표적이 되는 중점이 바로 행위라는 전통을 만들고 지속시켰다. 샌더스의 책에 대하여 필자가 쓴 글을 읽어본다면 알 수 있듯이, 이러한 틀은 이제 신약학자들에 의해 정당하게 거부된다.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행위냐, 행위가 아니냐가 아니라, 그 행위가 공로로 인정되느냐 이다. , 비상응성을 강조하기 위해 바울은 행위에 대해 다룬다. 행위 자체에 대해서는 바울은 긍정한다. 그런 점에서 유대교를 행위 종교라고 욕하는 것은 초점을 잘못 잡은 셈이다.

 

또한 바클레이는 새 관점을 비판하면서 그들의 노선과도 결별한다. 새 관점이 사도 바울의 신학을 사실상 유대교 교리의 연장인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그가 보기에 바울의 신학의 독특성을 제대로 대우한 것이 아니다. 특히 바울이 비상응성을 매우 강조한다는 점은 유대교와 바울을 조화시키려는 시도가 부당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유대교 내에서 은혜와 관련된 표현들이 등장한다는 이유로 바울이 유대교의 교리를 그대로 따라가거나 약간의 변형을 하고 있다고 섣불리 결론 내려서는 안 된다. 유대교가 사용하는 그 은혜의 용어가 어떤 극대화의 범주에 해당하는가를 분석하고 그것이 바울의 극대화와 어떻게 다른가를 추적해 제대로 된 평가를 내려야 한다.

 

유대인의 문제점

 


 

그렇다면 필자의 블로그에 방문하는 구원파 출신 분들에게 바클레이가 소개하는 고대 사회의 선물의 개념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실제로 필자가 잠언 묵상을 하면서 이 개념을 처음 소개했을 때 몇몇 분들은 구원파인 대한예수교침례회(생명의말씀선교회, 이하 대침)에서 가르치는 내용, 곧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는 내용과 이것이 유사하게 보인다는 점 때문에 우려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선물에 대한 보답의 의무란 어떤 시간과 비용을 사용하는 것을 말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바울이 집중하는 은혜의 유효성과 순환성의 부분은 어디까지나 선물의 수혜자가 그것을 받을 자격이나 지위에 걸맞는 삶을 사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은혜에 대한 보답은 은혜가 큰 만큼 자신의 삶을 그것에 어울리게끔 가꾸는 것이다. 당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되는가? 그렇다면 그 은혜에 맞게 품위 있는 삶,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도록 하라. 이것이야말로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반면에 대침에서 주장하는 은혜에 대한 보답은 교단의 교세 확장과 관련이 있다. , 시간과 비용을 교회에 투자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것은 바울이 말하는 은혜를 보답하는 삶이 지향하는 방향과는 다른 무엇이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치가 낮은 것으로 격하시킬 위험도 존재한다. 과연 하나님의 충만한 선물의 가치가 시간이나 비용을 교단에 헌납하는 것으로 갈음될만한 어떤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 귀중하게 보시는 것은 극복된 인간 자체이지, 인간이 제공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원하신다. 당신이 제공하는 무언가가 아닌.

 

오히려 바클레이의 연구를 보면서 우리는 변화된 삶을 살지 않는, 그리고 살 생각을 별로 갖고 있지 않은, 그러면서도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는 이상한 사람에 대해 성경이 결코 긍정적으로 그리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바울의 율법의 행위는 유대교의 관습을 의미

 


 

하나님의 은혜는 분명 비상응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맞다. ,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 은혜는 우리를 찾아온다. 그러나 동일한 은혜가 무기력한 것은 아니다. 그 은혜는 유효성을 가지고 우리를 실제적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다. 또한 그 은혜의 효력으로 말미암은 변화는 우리가 하나님의 선물을 받을만한 존재에 부합하도록 만들어 하나님의 선물에 적절히 반응하도록 만든다. , 그 은혜의 유효성으로 인해 순환성이 확보된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의 곁다리가 아니다. 필연적인 핵심이자 근본적인 특징이다. 구원의 여정에서 이런 것들이 반드시 드러난다. 사도 바울의 서신에서 이런 은혜의 극대화의 특징들의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한 사람이라면, 이런 것들을 소홀히 여겨 간과하지 않을 것이다.

 

기독교인은 반드시 변화한다. 그리고 반드시 보답한다. 또한 보답의 의무를 진다. 그리고 그 의무는 선을 행하고 사랑하여 하나님의 자녀에 걸맞는 품의를 갖는 것이다. 그것이 기독교인의 삶을 정의하는 본질이다. 바울은 행위를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적극적으로 행위를 긍정한다. 그가 부정하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그 행위가 공로로 취급되는 상응성이다. 그러므로 행위가 나올 수 있는 은혜의 유효성, 그리고 행위를 통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은혜의 순환성을 그는 계속해서 강조한다. 어쩌면 바울이야말로 가장 행위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신학자 중 한 명이었을 것이다.

 

기독교인은 비상응적으로 은혜를 만나지만, 그의 구원의 과정에는 언제나 행함이 존재한다. 우리에게 선물을 주신 황제 하나님 아버지께 우리는 마땅히 다시 보답해야 한다. 그렇게 우리의 선물이 완성을 향해 달려갈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정적인 것이 아니라, 완전을 향한 여정이다. 가장 작은 자에게 냉수 한 그릇 내어주는, 그런 사랑의 마음이 활동하는 역동적인 삶의 길, 이미와 아직의 구원이다.

부록: 선물에 대한 용어들. 그리스어, 히브리어, 라틴어, 영어

 

 

 


 

 

 

 

 

이사야 9장 2절 묵상: 어둠 속의 빛 (사 9:2) Meditation on Isaiah 9: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이사야 9장 2절 이사야서는 많은 부분에서 메시아적인 기대와 소망을 표현하는 구절들을 많이 갖고 있습니

littlebiblicaltheology.tistory.com

 

『신의 설계자들』, 이스라엘 크놀

보다 성서신학적인 글을 쓰겠다고 말한대로, 이번에는 교리적인 것 보다 성서신학과 관련된 책을 리뷰해 보고자 한다. 예루살렘의 히브리 대학 석좌 교수인 이스라엘 크놀(Israel Knohl)의 저서, 『

littlebiblicaltheology.tistory.com

 

잠언 18장 16절 묵상: '선물'은 긍정적인가 부정적인가 (Meditation on Proverbs 18:16)

선물은 그 사람의 길을 너그럽게 하며 또 존귀한 자의 앞으로 그를 인도하느니라 잠언 18장 16절.    흔히 전도를 우선시하는 교회, 특별히 구원파 중 하나인 대한예수교침례회(생명의말씀선교

littlebiblicaltheology.tistory.com

 

향후 블로그의 방향에 대한 짧은 생각

최근에 너무 바빠져서… 참 고민이 많습니다. 그래서 블로그 자체의 방향을 약간 바꿀 생각입니다. 기존에는 블로그 글을 매우 고 퀄리티의 긴 내용을 기본으로 하려고 노력했습니다만, 시간

littlebiblicaltheology.tistory.com

 

반응형

이 글이 도움이 되었다면 ♡를 눌러 주세요. 익명성이 필요한 질문일 경우 Q&A 카페를 이용해주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