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한국 교회에는, 특히 한국의 이단들 가운데에는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는 많은 가르침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인용되는 것들은 마 24장 3-14절, 막 13장 3-13절, 눅 21장 7-19절에서 소개되는 난리와 난리의 소문, 전쟁, 기근, 지진 등이다. 많은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는 교회 혹은 교단 혹은 이단들은 이 본문의 내용을 근거로 현대에 종말이 가까이 왔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이 이렇게 말하면서 곧 다가오는 종말을 빌미로 사람들이 자신들의 집단에 봉사하고 순종하도록 만드는 것들을 경계해야 한다. 과연 기근, 지진, 전쟁 등이 고대 보다 현대에 더 많았느냐의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성경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기근, 지진, 전쟁, 난리와 소문 등을 종말의 직접적인 증거가 아닌 일반적인 사회의 현상이자 재난의 시작 정도로 제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이단들의 강조와는 달리) 결정적으로 이런 것들을 보면서 종말이 왔느냐 아니냐 등의 가르침들에 미혹되지 말고 지나치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즉, 필자는 이번 글에서 이런 사회의 일반적인 혼란들을 종말이 가까이 온 것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로 여기는 것에 대해 반대할 것이다. 이것은 필자의 견해가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해당 본문들에서 그렇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또한 학자들 역시 일반적으로 이것에 동의한다.
그러므로 앞으로 이런 요소들을 이야기 하면서 종말이 현대에 특별히 가까이 왔다고 말하는 시한부 종말론을 만나면,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것과 다른 가르침일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경계하라고 하신 미혹의 가르침과 가까운 것이라는 것을 상기하고 경계하면 좋을 것이다.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제자들이 성전의 파괴와 예수의 재림, 그리고 세상 끝에 있을 징조에 대해 질문하자, 예수께서는 먼저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을 설명하신다(마 24:4). 헬라어 “플라나오(πλανάω; 미혹하다)”는 고전 6:9; 15:33; 갈 6:7; 딤후 3:13; 요일 1:8; 2:26; 계 2:20; 12:9 등에서 종교적인 미혹의 상황에서 사용되었다. 1
이 미혹은 무엇인가? 학자들은 이것이 단순히 메시아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해그너(Donald A. Hagner)는 예수께서 경고하시는 종교적인 이러한 속임수가 “이중적”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것은 메시아가 왔다는 것 외에도 종말론적인 심판이 시작되었다는 가르침도 포함된다. 대럴 벅(Darrell L. Bock)은 이것을 좀 더 선명하고 강력하게 제시한다. 누가복음 21장 8절에 대해 주해하면서, 그는 이 본문이 “거짓 주장들”에 대해 다루는 것으로 분류한다. 곧,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먼저 종말의 징조가 ‘아닌 것’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2 3
특별히 누가복음 21장 8절의 헬라어 본문은 자신이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거짓된 가르침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에 추가로(“카이”; “καί”) “그 때가 가까이 왔다”라는 “호 카이로스 엥기켄(Ὁ καιρὸς ἤγγικεν)”을 기록한다. 그러므로 미혹 받지 말아야 할 가르침에는 두 가지의 것이 제시된다: 곧, 자신이 메시아라는 주장, 그리고 종말이 가까이 왔다는 주장이다.
물론 신약시대에는 종말이 가까이 왔다는 가르침들이 초기 기독교 내부에도 있었다. 사도들은 그들의 가르침에서 종말적인 시각을 견지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경계하고자 한 것은 이런 평이한 수준의 “지금은 종말의 때이다.”가 아니라, 극단적인 경향성을 띠는 종말이 가까이 왔다는 가르침이다. 왜냐하면 예수님 당시에 종말적인 메시아 운동이 연달아 일어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종말론 자체에 지나치게 매몰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미혹하는 가르침을 주장하는 자들은 추종자들을 모으고 자신이 로마 제국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군사적으로 구원할 메시아라고 주장하며 집단적인 봉기를 일으키도록 유도했다.
흔히 이런 극단적인 움직임들은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면서 사람들을 모아 그들의 온 재산을 처분하게 만드는 것으로 현대에 나타나기 마련이다. 고대에 로마 제국에 대항하여 봉기하는 주요 동기로서 종말론이 활용되었다면, 현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어떤 집단이나 단체에 모여 돈을 헌금하게 만드는 것에 종말론이 활용된다. 그래서 현대의 이단들은 종말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빌미로 신도들을 결집시키고, ‘어차피 세상이 곧 끝나기 때문에 복음을 위해 재산을 바쳐라’라는 주장을 합리화 한다.
예수께서는 아주 분명하게 자신이 메시아라는 주장, 그리고 종말이 가까이 왔다는 주장에 쉽게 미혹되지 말고, 이런 가르침을 남발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따르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메 포레우떼테 오피소 아우톤(μὴ πορευθῆτε ὀπίσω αὐτῶν)”, 곧 “너희는 그들의 뒤를 따라가지 말 것이다”는 예수님 사후에 종말에 대한 이런 미혹의 가르침들이 많이 있을 것이고, 그것을 따르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많은 이단들이 종말이 임박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예수님의 가르침을 인용하면서도, 이 본문에 대해서는 많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은 그들의 성경 해석이 편파적임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존 놀랜드(John Nolland)는 여기서 예수님의 경고는 모든 종말론에 대한 설교를 금지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반면에 여기서의 초점은 종말론을 빌미로 추종자를 모으는 것과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대개 자신을 메시아로 제시하는 등을 통해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따르게 만들려는 사람들은 종말론을 통해 그렇게 해왔기 때문이다. 로마와의 큰 전쟁을 치르기 위해 많은 거짓된 인물들은 임박한 시한부 종말을 가져와 사람들을 미혹했다. 학자들은 이런 거짓 선지자들의 종말적 가르침과 미혹에 대해 비판하는 요세푸스의 글들이 예수님의 이 가르침의 표현들과 매우 유사하다고 말한다. 4 5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온다는 것은 또한 단순히 이 미혹하는 자들이 “내가 메시아다”, 혹은 “내가 예수다”라는 것으로만 특징지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라고 선전, 홍보한다. 즉, 이 거짓 선생들은 추종자들을 모으고 미혹하기 위해 예수의 이름, 혹은 권위를 사용하는 것이다. 6
필자가 다녔던 대한예수교침례회(생명의말씀선교회, 이하 대침)에서는 이 본문들을 자신을 재림 예수로 제시하는 사람들에게만 한정하여 이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누가복음의 헬라어 본문과 예수님 당시의 시대 상황, 그리고 헬라어 “폴로이 엘레우손타이 에피 토 오노마티 무(πολλοὶ ἐλεύσονται ἐπὶ τῷ ὀνόματί μου)” 등을 고려할 때 재림 예수라 주장하는 사례들에 뿐만 아니라 예수의 권위로 오는 모든 거짓 선생들로 이것을 확장하여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두려워 말라, 끝은 아니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본문이 종말의 직접적인 징조를 설명하는 것이 아닌, 미혹 받지 않도록 거짓된 주장들, 곧 엄밀히 말해 징조라고 여기기 힘든 것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은 그 다음 내용들을 통해 알 수 있다.
거짓 선생들의 종말을 이용한 추종자 모으기를 경계하면서, 난리와 소란, 그리고 소문을 듣는 것에 대해 예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이것들이 끝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끝은 아직 아니니라”, 그리고 누가복음의 “끝은 곧되지 아니하니라”는 제자들이 혼란스러운 사회적 상황 속에서 종말이 지금 온다고 주장하는 거짓 가르침들에 속지 말아야 함을 보여준다. 난리와 소문 등이 횡행할 때에 거짓 선생들이 일어나 '계속해서 지금 이런 일들이 있는 것은 종말이 가까이 왔기 때문'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제자들은 이런 혼란스러운 일들이 일어날 때에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종말의 직접적인 징조는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예수님의 사전 경고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미혹될 것이다. “난리”로 번역된 “폴레모스(πόλεμος)”는 “전쟁”을 의미하며, 이것은 특별히 제 2성전기 유대 문헌들 중 묵시적 상황에서 자주 사용되는 용어이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소위 이런 ‘묵시적’ 현상들을 보면서 “이제 곧 세상이 끝나는구나!”하고 생각하며 이런 임박한 종말론을 가르치는 거짓 선생들의 추종자가 될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이런 것들에 속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이런 현상들은 있어야 할 것들이지만, 끝을 설명해주는 것들은 아니다(마 24:6). 세상에는 이런 일들이 언제나 있어 왔다. 7
학자들은 이것이 실제적인 종말적 심판의 한 단면을 예시로 보여주는 것은 맞으나, 예수의 종말적 사역의 합당한 때를 나타내는 징조인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끔찍한 일들이 분명히 일어나는 것은 맞지만, 종말이 온 것은 아니라고 단언하고 계신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당시에 유대인들의 로마에 대항한 전쟁이 예수님의 임박한 재림의 분명한 표적이라고 여기기도 했었다. 8 9
그러나 예레미야 51장 46절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런 것들은 사회의 일반적인 현상들이며 종말의 직접적인 징조는 아니다:
”너희 마음을 겁약하게 말며 이 땅에서 들리는 풍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풍설은 이 해에도 있겠고 저 해에도 있으리라”
예레미야나 예수님의 이런 견해와는 다르게 후대의 랍비들은 “소리들과 난리들”이 종말을 알리는 징조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10
세대주의를 지지하는 학자인 대럴 벅은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더욱 선명하게 전달하는 학자 중 한 명이다. 그는 누가복음이 예수님 승천 이후 완전한 세상의 종말 때까지의 긴 중간기를 제시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는 “난리와 소란의 소문” 등의 현상들은 ‘종말 이전’의 긴 중간기에 속하는 혼란스러운 상황에 해당한다고 여긴다. 즉, 이것들은 미래의 심판의 예고편이긴 하지만, 세상의 종말이 가까이 왔다는 징조인 것은 아니다. 11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것들을 이용해 사람들을 공포스럽게 만들고 추종자를 모으는 자들의 가르침에 대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이것에 대해 두려워하지 말라고 미리 주의를 주셨기 때문이다. 예수의 말씀으로 무장된 그리스도인들은 거짓 선생들의 이런 공포 조장 가르침들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
재난의 시작이니라
예수께서는 민족과 국가 내의 내란, 그리고 기근, 지진 등에 대해 설명하시며 이것들이 “재난의 시작”이라고 말씀하신다. 많은 학자들은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마 24:7)”라는 표현이 위의 “폴레모스”, 곧 “전쟁”을 좀 더 구체적으로 풀어 설명하고 있는 것이라 올바르게 지적한다. 즉 위의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는 것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부연 설명을 하고 계신다. 이런 혼란들은 위에서 예수께서 이미 언급하신 대로, 종말의 직접적인 증거는 아니다.
마찬가지로 기근, 지진, 온역 등도 예수님의 설명에 의해 같은 범주로 묶인다. 그래서 해그너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사건 외에 ‘처처에서’ 일어나는 ‘기근과 지진’조차 이 시대의 종말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12
반면에 이것은 예수님 승천 이후 교회가 만나게 될 재난의 시작에 불과하다. 크레이그 에반스(Craig A. Evans)는 마가복음 13장 8절을 주해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런 일들’ - 메시아라 지칭하는 자들(6절), 난리와 난리의 소문들(7절), 민족들 간의 싸움(8a절), 지진과 기근(8b절) – 은 모두 ‘산통의 시작’일 뿐이다.” 13
존 놀랜드(John Nolland)는 누가복음의 끝은 당장에 있지 않을 것이라는 표현이 “재난의 시작”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긴다. 그리고 “재난의 시작”은 종말의 징조인 것은 아니다. “재난의 시작”을 활용해 추종자들을 모으고 시한부 종말론을 앞세워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거짓 주장들에 대해 우리는 속지 말아야 한다. 대럴 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14
“예수가 누가복음 21장 7~11절에서 언급하는 징조들이 아닌 사건들과 더불어, 이 절은 온 세상이 큰 혼란에 빠지는 모습을 묘사해준다. 하지만 이 혼란스러운 모습 자체는 종말에 대한 징조가 아니다.” 15
특별히 대럴 벅의 다음과 같은 논평은 종말의 징조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 전체 본문을 파악하는 데에 유익한 관점을 제공한다:
“종말의 혼란스러운 상황이 무엇과 같은 지 구체적인 예로 보여주기 위해서, (AD 70년) 예루살렘의 멸망이라는 사건이 의도적으로 언급된다. 하지만 그 사건 자체는 종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 사건은 완전한 구속이라는 변경될 수 없는 움직임을 향한 피조 세계의 ‘신음’이자 시작인 것이다(롬 8:18~24).” 16
이것은 신약학자들이 말하는 종말의 “이미-아직(already but not yet)”의 관점이 성경에서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재난의 시작을 보면서 종말로 향하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종말의 임박을 증거하는 구체적인 징조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절정의 심판의 예비적인 방식을 보여줄 뿐이다. 17
그러나 이것을 종말이 임박했다는 징조로 해석하는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거짓된 가르침에 제자들이 미혹되지 않기를 바란다. 사회는 언제나 혼란과 악한 일들이 있어 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혹은 더욱 심해질 수도 있다. (혹은 단순히 그렇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보면서 호들갑을 떨면서 두려워하거나 지나치게 매몰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종말의 임박성을 주장하는 거짓 선생들을 따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결론
많은 한국의 이단들은 현대 사회의 혼란을 보면서 종말이 임박한 징조라고 주장한다. 흔히 거의 모든 세대에서 사람들은 “말세다, 말세야”라는 방식으로 자신들이 사는 사회의 더러움과 혼란스러움을 지적하곤 한다. 마치 이것과 같이, 고대 사회에도, 그리고 현대 사회에도 종말을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반면에 예수께서는 이런 흔한 거짓 선생들과는 다르다. 예수께서는 사회의 혼란들은 종말이 임박했음을 보여주는 징조가 아니라 그저 먼저 있어야 할 것들 중 하나라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재난의 시작, 곧 종말 이전에 있을 일들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이런 것들에 부화뇌동하지 말아야 한다. 또 이런 것들에 지나치게 매몰되지 말아야 한다.
더욱이 이런 것들을 앞세워 추종자들을 모으려는 자들에게 미혹되어 따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심지어 그들이 예수의 이름을 힘입어 나아온다고 해도 말이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런 거짓 선생들이 사람들을 충동시켜 로마와 전쟁을 하도록 만들곤 했다. 그리고 기독교 역사에서 많은 사람들이 일어나 여러가지 징조들이 “종말의 임박”을 보여준다고 주장하면서 사람들을 모으곤 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현상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구원파 3교단은 모두 현대 사회의 혼란들을 “종말의 징조”로 해석하여 임박한 시한부 종말론을 가르친다. 이것을 통해 그들은 신도들에게 자신들의 교단의 확장을 위해 행동하도록 만든다.
대침의 경우에는 전도집회(성경강연회) 과정에서 전쟁, 기아, 기근, 지진, 기후 변화, 온역 등등을 지적하며 위의 예수님의 본문을 맥락을 무시한채 인용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런 것들이 성경에서 예수께서 예언한대로 종말이 임박했음을 말해주는 징조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것이 현대 사회에 특히 그렇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위의 가르침들을 신중하게 독해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이런 주장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곡해하고 있는 것임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오히려 대침과 같이 사회의 혼란들을 통해 종말의 임박성을 가르치고 추종자를 모으려는 집단들을 경계하고 따르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이런 극단적인 종말론이 가져올 파멸적인 결과에 대해 잘 알고 우려하셨을 것이다. 실제로 어떤 이단의 경우에는 세상이 곧 끝난다며 자신들의 재산을 전부 처분하고 해외의 섬에서 공동 생활을 하기도 한다. 18
그렇다면 왜 이런 이단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곡해하여 전체가 종말의 징조에 해당한다고 해석한 것인가? 이것은 그들이 제자들의 질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제자들이 예수께 물어본 것은 종말의 징조에 대한 것만 물어본 것이 아니었다. 누가복음 21장 7절에서 제자들은 성전이 파괴되는 때가 언제인지, 그리고 성전 파괴의 징조가 무엇인지에 대해 물어본다. 마태복음 24장 3절에서는 제자들이 성전 파괴가 언제 일어나는지, 예수님의 재림, 그리고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을 것인지 묻는다. 즉, 제자들의 질문은 애초에 한 가지 주제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여러가지 요소에 대해 물어본 것이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먼저 미혹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치시고, 다음으로 기독교 역사에서 교회가 당할 박해를 말씀하신 뒤, AD 70년의 예루살렘 성전 파괴를 세상 끝에 있을 종말의 예고편으로 제시하신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예루살렘의 성전 파괴와 세상 종말에 있을 큰 환란을 구분하지 않고 결합하여 설명하는 반면에, 누가복음은 이것들을 21장 24절을 기점으로 구분하여 서술한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21장 24절에서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 긴 기간의 중간기가 있을 것으로 제시되는 것으로 보인다. 19 그리고 곧바로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것으로 세상이 끝난다. 20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이것을 설명하는 본문 전체를 종말의 징조로 제시하시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설명 안에는 제자들이 질문한 많은 요소들에 대한 대답을 포함하고 있으며, 맥락과 예수님 자신의 설명을 전부 무시한채 이것들 전체가 단순히 세상 종말의 징조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라 여기는 것은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이나 사도들은 언제나 종말이 불시에 갑자기 임박한다고 가르쳤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의 급작스러움은 노아의 때, 두 사람의 비유, 충성스러운 종의 비유(마 24:37-51), 열처녀 비유(마 25:1-13),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이를 것이라는 사도 바울의 설명(살전 5:2-3) 등을 통해 잘 드러난다. 그러므로 때와 시기를 추적하는 것은 권장되지 않는다(마 24:36; 살전 5:1). 때와 기한은 하나님의 권한이기에 우리의 알 바가 아니다(행 1:7).
그러므로 사회의 일반적인 혼란들을 가리켜 종말의 징조로 제시하는 자들을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이런 자들이 미혹하는 자들에 속하며, 거짓 선생이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왔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하여야 한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이 이런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에 미혹되지 않기를 바라신다. 왜냐하면 예수님에 의하면 이런 것들은 종말의 징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고대로부터 있어 왔던 여러가지 재난이나 인류의 악행들은 종말을 향해 나아가는 “시작”에 해당한다. 그것은 “끝”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다.
“끝”은 도적 같이 갑자기 다가올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와 시기에 대해 추적하기 보다는 항상 깨어 있는 것이 더 낫다(눅 21:34-36).
대침의 L목사는 “지금은 마지막 때”라며 현대 사회의 전쟁, 기근, 기후 변화, 팬데믹 등이 성경이 말하는 이 종말의 임박을 증거하는 징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예수께서는 그런 것들은 “끝”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그런 것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런 것들을 강조하는 자들에게 미혹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대 사회의 혼란들을 임박한 종말의 징조로 제시하는 자들에게 미혹되지 말아야 한다.
볼트(Peter G. Bolt)의 다음과 같은 말과 같이,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사실, ‘전쟁과 소란에 대한 소식을 들으면서’(21:9)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일들은 타락한 세상의 일반적인 구조의 일부이지만(단 9:26), 종말이 그러한 사건과 즉시 연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아무런 신호도 보내지 않는다.” 21
- Craig A. Evans,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34B Mark 8:27-16:20, trans. Cheol Kim, Solomon Press, 2001, 523. [본문으로]
- Donald A. Hagner,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33B Matthew 14-28, trans. Cheon Seok Chae, Solomon Christian Press, 2000, 402. [본문으로]
- Darrell L. Bock, Luke 9:51-24:53, trans. Gi Cheol Sin, Revival & Reformation Publishing, 2017, 1041. [본문으로]
- John Nolland,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35C Luke 18:35-24:53, trans. Kyeong Jin Kim, Solomon Press, 2005, 245. [본문으로]
- Craig A. Evans,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34B Mark 8:27-16:20, trans. Cheol Kim, Solomon Press, 2001, 524. [본문으로]
- Donald A. Hagner,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33B Matthew 14-28, trans. Cheon Seok Chae, Solomon Christian Press, 2000, 402. [본문으로]
- Ibid., 1064-1065. [본문으로]
- Ibid., 1065. [본문으로]
- Craig A. Evans,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34B Mark 8:27-16:20, trans. Cheol Kim, Solomon Press, 2001, 526. [본문으로]
- Ibid. [본문으로]
- Darrell L. Bock, Luke 9:51-24:53, trans. Gi Cheol Sin, Revival & Reformation Publishing, 2017, 1043. [본문으로]
- Donald A. Hagner,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33B Matthew 14-28, trans. Cheon Seok Chae, Solomon Christian Press, 2000, 1065. [본문으로]
- Craig A. Evans,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34B Mark 8:27-16:20, trans. Cheol Kim, Solomon Press, 2001, 529. [본문으로]
- John Nolland,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35C Luke 18:35-24:53, trans. Kyeong Jin Kim, Solomon Press, 2005, 246. [본문으로]
- Darrell L. Bock, Luke 9:51-24:53, trans. Gi Cheol Sin, Revival & Reformation Publishing, 2017, 1046. [본문으로]
- Darrell L. Bock, Ibid., 1045. [본문으로]
- John Nolland,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35C Luke 18:35-24:53, trans. Kyeong Jin Kim, Solomon Press, 2005, 247. [본문으로]
- https://namu.wiki/w/%EC%9D%80%ED%98%9C%EB%A1%9C%EA%B5%90%ED%9A%8C%20%ED%94%BC%EC%A7%80%EC%84%AC%20%EC%8B%A0%EB%8F%84%20%EA%B0%90%EA%B8%88%EC%82%AC%EA%B1%B4 [본문으로]
- Darrell L. Bock, Luke 9:51-24:53, trans. Gi Cheol Sin, Revival & Reformation Publishing, 2017, 1064. [본문으로]
- 이것은 세대주의 학자인 대럴 벅의 경우에 그렇다. 하지만 존 놀랜드 역시 이것을 암시하고 있다. (WBC 해당 주석의 264를 보라.) [본문으로]
- https://www.thegospelcoalition.org/commentary/luke/#section-1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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