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장 하와의 창조: 여성과 기독교적 결혼의 의미 (창 2:18-24). Meditation on Genesis 2:18-24

기독교 관련 생각들

창세기 2장 하와의 창조: 여성과 기독교적 결혼의 의미 (창 2:18-24). Meditation on Genesis 2:18-24

바잇 카탄 2024. 4. 22. 20:05

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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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현재 한국 사회는 혐오의 사회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세대, 지역, 정치 등의 갈등이 현시점에서는 거의 최고조에 이르러 있다. 그중에서도 단연 가장 큰 갈등의 주제를 따지자면, 특히 결혼을 앞둔 젊은 세대에게는 '남녀 갈등' 만큼 핫이슈인 것은 없다. 이미 2030의 젊은 세대들은 남녀 간에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으로 보인다. 이에 발맞춰 많은 사람들이 결혼을 포기하고 있으며 출산율 역시 역대 최저를 기록하고 있다.
 
 이런 혼란스러운 사회 상황 속에서 기독교인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 것인가. 다른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상대방의 성별을 향해 혐오를 표현하며 결혼해서는 안 된다고 말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다시금 성경으로 돌아가 아직 이런 갈등들이 생겨나기 한참 이전인 고대 사회에는 결혼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특히 성경 자체의 결혼에 대한 입장은 무엇인지, 이것을 살펴보아야 하는 것인가?
 
 이번 글은 무엇이 옳고 그르냐에 집중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논쟁적인 어조는 최대한 배제하고 창세기 본문에서 말하는 여성, 그리고 결혼에 대해서 담담하게 소개할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이 비기독교인이라면, 당신은 성경이 말하는 여성과 결혼이 무엇인가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이 글을 읽는 사람이 기독교인이라면, 당신은 남녀가 서로를 향해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현시점에서 기독교인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약간의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진심으로 그렇게 되길 바라고 기도한다.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했기 때문에 돕는 배필을 지으셨다.


 성경 전체에서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은 2장 18절부터이다. 그 이전까지는 인간을 "남자와 여자"라는 포괄적인 용어로 서술한 것(창 1:27) 외에는 여성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나 암시하는 것이 없다. 성경은 이때까지 남성이 홀로 생활했던 것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그 사람은 바로 아담이었다. 
 
 아담이 여성 없이 혼자 생활했을 때 어떤 방식으로 살고 있었는지 성경은 상세하게 이야기해주지는 않는다. 아마 그의 외로움은 짧은 시간 만에 막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그가 느낀 고독함과 홀로 거하는 독신의 상태가 아담 자신에게,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입장인 신(하나님)에게 어떻게 보였는가가 성경에서 제시된다. 그것은 "좋지 못"했다(창 2:18).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할 때 무려 일곱 번(7)이나 "좋았더라"가 강조되었다(창 1:4, 10, 12, 18, 21, 25, 31). 고대 히브리인들의 세계관에서 숫자 "7"은 신의 완전성을 상징하는 수이다. 따라서 창세기 1장은 의도적으로 "좋았더라"를 7번 반복하는 것으로 창조의 전체 상태가 완전했으며 굉장히 좋았다는 것을 강조한다.
 
 반면에 2장 18절에서는 처음으로 하나님의 창조된 것들 중 좋지 않은 것이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성경을 유심히 쭉 읽어 내려가는 독자들을 깜짝 놀라게 만드는 부분이다. 신이 창조한 것들 중 좋지 않은 것이 있다니! 심지어 이렇게 창조가 좋지 않은 상태에 있다고 지적하는 주체는 다름 아닌 창조자 하나님 자신이다("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따라서 독자들은 이 "좋지 않은 것"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좋지 않은 것"이란 남성인 아담이 독신의 상태로 혼자 살고 있다는 것, 더욱 포괄적으로 말하자면 "사람이" 혼자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혼자 살고 있는 상태는 마치 완벽해야 할 작품이 가진 옥에 티와 같다. 오늘날의 사회도 인간이 홀로 고립되어 생활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사회는 이런 사람들을 위해 다양한 복지 제도들을 마련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 본문이 지적하는 인간의 독처가 좋지 않다는 것은,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일반적인 명제를 지시하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아담과 같은 남성들을 많이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가장 강력한 결합인 결혼을 바라보게 만든다. 성경은 제아무리 인간이 사회적인 활동들에 참여한다고 해도, 인간 자신의 개인적인 영역을 전부 공유하는 또 다른 존재가 없다면 이것은 좋지 않은 상태에 있다고 여기는 듯하다. 그러므로 신은 아담이 이런 좋지 않은 상태에 있지 않도록 하기 위해 여성을 창조해야 한다.
 
 "돕는 배필(עֵ֖זֶר כְּנֶגְדּֽוֹ; 에제르 케네그도)"은 하나님이 창조하려고 하는 여성이 어떤 특성을 지니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단어이다. "에제르(עֵ֫זֶר)"는 "도움, 조력"을 의미하며, "help, assistance"의 의미를 가진다. 이 단어는 하나님이 인간을 도울 때나, 군사적 지원이나, 아니면 일반적인 상황에서의 도움 등에서 사용된다. 그리고 이 단어는 도움을 받는 자나 도움을 주는 자 사이의 지위의 높낮이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미를 전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여성이 남성을 단순히 돕는 위치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또는 남성이 열등하기 때문에 여성이 도와줘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남성은 여성이 없이는 부족하며, 여성 역시 남성이 없이는 부족하다. 그러므로 이 도움은 상호보완적이다.
 
 도움의 상호보완성은 "배필"로 번역된 명사 "네게드(נֶ֫גֶד)"에 의해 더욱 선명해진다. "네게드"는 "어떤 대상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을 일차적으로 의미한다. 그래서 "네게드"는 어떤 사람 앞에 대등하게 서 있는 사람, 혹은 자신에게 반대하여 일어난 적 등에 대해서 사용되었다. 「HALOT」에서는 이것을 보다 명확하게 표현한다:

"that which is opposite, that which is corresponds"[각주:1]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이미지는 이 둘의 대상이 동일한 것은 아닐지라도 동등한 것은 맞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의도했던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존재 상태는 바로 이것이다. 즉 서로 다른 두 대상이 서로에게 대응하여 맞대어 서 있는 상태이다. 이것을 보면서 철학적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헤겔의 정(正), 반(反), 합(合)의 진리를 떠올렸을 것이다. 서로 다른 두 영역이 서로에 대해서 영향받으면서 더 높은 진리를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성경은 인간의 이러한 극과 극이 만나 상호보완적 관계를 이루는 상태가 서로에게 진정한 "도움"을 주는 것으로 묘사한다. 어째서 인간은 남성과 여성이어야 하고, 여성은 남성이 필요하며 남성은 여성이 필요한 것인가? 서로의 다른 생물학적 요소, 다른 성격과 성향이 서로를 좀 더 나은 존재가 되도록 이끌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든 영역에서 서로가 서로를 극단의 방향으로 선을 넘지 않도록 잡아준다는 의미에서 진정한 "도움"을 주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과 같은 특징을 지닌 사람들끼리 모였을 때에는 얻을 수 없는 특별한 양상의 교제가 존재한다. 그것은 나와 대응하여 서 있는 나와는 다른 특징을 지닌 한 사람을 만나 그와 교제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서로가 서로에 대해 상호보완적인 도움을 주고, 서로가 서로에 대하여 더욱 완전한 인간다움을 획득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과연 이렇게 서로 다른 상태의 인간, 곧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결혼하는 것이 "좋은 것"인가? 남녀의 너무나 다른 특성들은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갈등이 극대화되면 그들의 결혼은 실패로 끝나고 이혼으로 종결된다. 위의 이야기들은 너무나 이상적인 결혼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맞다. 이 지적은 타당하다. 나는 창세기가 말하는 "결혼"은 이상적인 결혼의 상태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세기의 본문을 통해 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결혼"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부부가 서로에 대해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면서 서로의 다름에 대해 영향받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 대하여 영향받으면서 함께 동화되어 가는 이 과정이 나는 이상적인 결혼이라고 생각한다.
 
 한쪽에서만 일방적으로 영향받지 않고, 또 각자가 서로에게 영향받지 않은 채 분리되지 않고, 둘 모두 서로에게 영향을 받는 것,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좋은 상태의 인간"이지 않을까. 
 


 

아담이 동물들에게 이름을 부여한다.


 그러나 신은 아담에게 곧바로 하와를 만들어주지 않는다. 오히려 동물들을 아담 앞으로 데리고 와서 그가 홀로 이름을 짓도록 만든다. 아담의 고독함은 더욱 심해지고 부각된다. 자연 생태계에 동물들은 정말 다양하고 많은데, 아담과 진정으로 소통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그 어느 것도 아담과 동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담이 동물들과 나누는 교제는 피상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아담은 동물들이 자신에게 이름을 받으며 서로 짝지어 생활하는 것을 본다. 동물들은 제각기 서로의 짝이 있는데, 이 세상에서 아담의 짝은 없다. 하와가 없는 이 잠시 동안, 아담은 분명 자신을 둘러싼 많은 동물들 속에서도 자신이 "혼자"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비슷한 것으로 현대 사회에서 지적되는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개념도 있다. 심지어 부부 간에도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할 때 동일한 것을 느끼곤 한다. 아담은 북적거리는 주변 분위기에도 자신만은 고독하다고 생각한다. 아담이 사색하고 고민하는 것을 동등한 위치에서 들어줄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로써 그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그에게 필요한 도움은 일상적인 노동이나 생물학적 출산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외로움을 이겨내는 소통의 도움이다. 이 마음의 공허는 훌륭한 자연환경과 다양한 동물 생태계로도 채워지지 않는 심연이다.
 
 아담은 동물들에게서 이것을 도울 수 있는 무언가를 찾지 못했다. 20절에서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다"라고 번역된 부분은 히브리어 "로 마짜(לֹֽא־מָצָ֥א)"이다. 이것은 직역하자면 "찾지 못했다, 발견하지 못했다"의 의미이다. 그는 계속해서 자신과 동등한 대상,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그런 존재를 찾고 있다. 위에서 말한 돕는 배필, 곧 "에제르 케네그도"를 말이다. 그런데 아담 앞에는 동물들 뿐이기 때문에 그는 결국 "에제르 케네그도"를 찾지 못한다. 
 
 과연 아담은 자신의 "에제르 케네그도"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빗대로 여자를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먼저 아담을 깊이 잠들게 만든다. "깊은 잠"은 "타르데마(תַּרְדֵּמָה)"이다. "타르데마"는 「HALOT」에 의하면 단순히 깊은 정도의 수면 상태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주로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일을 수행하는 상황에서 등장한다. 그러므로 "타르데마"는 아담에게 신비로운 하나님의 역사가 발생할 것임을 우리에게 암시해 준다. 아담이 모르는 사이에, 그리고 사람들이 목격할 수 없는 어떤 순간에, 하나님의 일이 조용히 시작되고 있었다.
 
 "타르데마"로 인해, 독자들은 은밀히 진행되는 이 사건이 어떻게 발생하고 있는지 주목하게 된다. 그리고 이 신비로운 분위기 속에서 이후에 나오게 될 결과가 무엇인가에 대한 기대감이 고조된다. 성경 본문에서 여성이 등장하는 것은 매우 긴 호흡을 통해 세심하게 구성되고 있다. 마치 18절에서부터 모든 요소들이 "여성의 등장"이라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정교하게 나아가는 것 같다. 적어도 창세기를 기록한 저자는 "여성의 등장"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어째서 신은 여성을 만들 때 남성의 갈비뼈를 사용했는가? "뼈"를 사용한 것은 고대 동양에서 인간의 가장 깊은 것이 그의 골수와 관련이 있다는 생각과 연관되어 있을 수 있다. 동양 세계관에서 뼈는 생명의 물질적 근원(essence)이 저장되어 있는 장소이다. 혹은 더 낫게는, 두 남녀가 결혼하여 한 가정을 이룬다는 일반적인 개념을 시사하는 것일 수 있다. 유대인들은 자신의 가족이나 친척 등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을 묘사할 때에 "골육"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곤 한다. 확실한 것은, 남성의 뼈로 여성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여성이 남성의 삶에서 가장 깊은 핵심을 차지한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 둘을 아주 긴밀하게 연관시킨다.
 
 그런데 인간을 구성하는 많은 뼈들 중 하필이면 갈비뼈(rib), 즉 "쩰라(צֵלָע)"를 사용한 이유는 무엇일까? "쩰라"의 통상적 의미는 "갈비뼈"인 동시에 "옆(side)"라는 의미도 함께 지니고 있다. 즉 신은 여성을 만들 때 굳이 남성의 "옆"을 사용하여 창조하였다. 이것은 여성이 남성의 가장 좋은 동반자요, 대등한 배우자로서 남성 옆에 가까이 존재할 수 있는 대상임을 나타낼 수 있다. 이것에 대해 메튜 헨리(Matthew Henry)는 페트루스 롬바르두스(Petrus Lombardus)의 말을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각색하여 인용한다:

"여자는 남자를 능가하도록 그의 머리로부터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그에 의해서 짓밟히도록 그의 발로부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와 동등한 존재가 되도록 그의 옆구리로부터,
보호받도록 그의 팔 아래에서
그리고 사랑받도록 그의 심장 가까이에서 만들어졌다."[각주:2]

 
 이것이 성경이 바라보는 이상적인 결혼에 대한 진술임을 상기하라. 창세기가 읽혔을 고대 근동 문화권에서 여성의 지위는 매우 열악했다. 여성들은 사유재산을 소유할 권리가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 남성의 법적인 지위 안에서만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당시의 남성들은 여성들을 이혼을 통해 마음대로 버리곤 했기 때문에 여성의 생존은 거의 언제나 불확실함 가운데 있었다. 이것은 기독교가 태동하던 시기까지도 그러했던 것으로 보인다. 랍비들의 문헌들을 살펴보면 여성이 남성을 기쁘게 하지 못할 경우 이혼 증서를 써서 내버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성경에 사용된 언어의 뉘앙스는 여성과 남성의 동등성, 곧 평등을 바라보는 것 같다. 그리고 고대 사회에서 보였던 여성 학대의 보편적 문화가 결코 신이 창조한 세계의 자연법칙으로 의도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오히려 이것은 후에 인류의 타락으로 왜곡되고 변질되기 이전의 이상적으로 존재했던 남녀 관계의 건강한 상태를 바라보게 만든다.
 
 겉보기에 성경은 노예 제도나 여성 학대를 옹호하는 듯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극복할 대상으로 여기기도 한다. 그래서 노예 제도나 여성 차별에 편승하는 기독교인도 있었지만, 동시에 이것들을 철폐하기 위해 노력했던 기독교인들도 많았다. 초대 교회가 여성들을 집사 등의 직분에 앉힌 것은 교회사를 조금이라도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아직도 한국 교회 중 극단적인 일부는 성경의 고대 문화를 반영하는 몇몇 구절들에 호소하여 남성의 지위가 여성의 지위보다 높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그러나 창세기의 해당 본문은 이런 생각을 거부한다.
 
 뼈를 살로 채우는 것은 여성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게 만드는 대목이다. 고대 사회에서 아름다운 생명체를 묘사할 때에는 거의 언제나 "살", 즉 "바싸르(בָּשָׂר)"가 사용된다. 하나님을 위해 드려지는 제사들은 항상 좋고 아름다운 살찐 생명체들로 준비되었다(시 66:15; 삼하 6:13; 암 5:22). 또 "바싸르"는 「HALOT」에 의하면 혈색 있는 불그스레한 피부를 뜻하기도 한다.[각주:3] 적절한 영양을 공급받기 힘들었던 환경에서 건강하게 살이 오르고 혈색 있는 피부는 미의 기준이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현대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바싸르"는 이런 아름다움을 지칭하는 대표적인 용어이다.
 
 그래서 하와의 등장과 함께 아담은 2박자 3소절, 그리고 3박자 2소절로 구성된 5행의 시를 통해 환희의 찬 감탄을 발한다. 이것은 아담이 처음 여성의 아름다움을 보고 느꼈던 황홀한 심경을 잘 보여주는 하이라이트 장면이다.
 

좃 하파암   
(이것은, 이번에는)

에쳄 메아짜마이   
(내 뼈 중의 뼈요)

우바싸르 밉싸리   
(내 살 중의 살이라)

레좃 익카레 잇샤   
(이것이 여자라 불릴 것이니)

키 메이쉬 루카하-좃   
(이는 남자로부터 이것이 취해졌기 때문이다)

 


 "내 뼈 중의 뼈(עֶ֚צֶם מֵֽעֲצָמַ֔י)", "내 살 중의 살(וּבָשָׂ֖ר מִבְּשָׂרִ֑י)"은 이것을 문자적으로 취급하든, 아니면 관용적인 표현으로 취급하든 하와가 아담에게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아담에게 하와는 자신의 뼈에서 나온 뼈이고, 살에서 나온 살이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성경에서 자신의 친척을 부를 때 "골육"이라고 표현한다(창 29:14; עַצְמִ֥י וּבְשָׂרִ֖י). 그러므로 아담은 하와를 자신과 혈연관계가 있는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두 남녀가 만나 하나의 가족을 이룬다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부모를 떠나 둘이 한 몸을 이룬다


 아담과 하와의 만남을 통해 결혼의 진정한 의미가 드러난다. 그것은 부모를 떠나 한 몸을 이루는 것으로 묘사된다. "떠나"로 번역된 "아자브(עזב)"는 물리적인 이동을 통해 어떤 장소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한다기보다는 계약을 저버리는 것으로 여겨야 한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모든 히브리인들이 결혼한 뒤에 자신의 부모가 사는 곳에서 떠나 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아자브"가 어떤 것을 금지하거나 계약을 파기하는 것, 무언가를 포기하는 것, 그리고 이혼하는 것에도 사용된다는 것은 여기서도 비슷한 의미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계약을 파기하는 것은 금지된다(신 12:19; 14:27; 29:24).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버리지 않으신다(신 31:8; 수 1:5).[각주:4] 그러므로 어떤 계약 관계를 취소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결혼하려는 자가 자신의 부모와 일종의 이런 상태로 나아가는 듯이 보인다. 흔히 십계명에서 하나님을 대하는 내용을 제외하면 부모를 공경하라는 명령이 가장 처음 등장한다고 지적되곤 한다. 굳이 십계명을 보지 않더라도, 고대 유대인들의 사고 속에서 인간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의무는 부모를 잘 섬기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사회 배경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 다음으로 중요한 인간의 책무로 간주되었다.[각주:5]
 
 하물며 부모에 대한 책무에서 벗어나 배우자에 대한 의무로 옮겨 간다는 이 묘사는 전통적인 가치관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이스라엘 독자들에게는 꽤나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결혼은 기존의 질서를 허물고 새로운 질서로 나아가는 변화의 시작이 된다.
 
 남자가 아내와 연합하는 것은 "다바크(דבק)"이다. "다바크"는 "붙다, 밀착되다, 착 달라붙다"의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 문맥에서 단순히 두 사람이 물리적으로 붙어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민수기 36장 7절에서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각 지파의 기업을 지켜야(דבק) 한다고 명령하는 것에서 사용되었다. 그래서 「HALOT」에서도 "다바크"를 "hold"의 의미로 제안한다.[각주:6] 그러므로 위의 "아자브"와 관련하여, 남자와 여자가 "다바크"하는 것은 두 사람이 일종의 의무를 동반하는 책임감 있는 관계로 들어섰음을 암시한다.
 
 이제 둘이 한 몸을 이룬다는 대목에서 또다시 "바싸르("몸")"가 사용되고 있다. 이미 아담은 하와를 보며 자신의 뼈에서 나온 뼈이자, 살에서 나온 살이라고 외친 바 있다. 이것은 결혼이라는 것이 마치 혈연관계로 인해 생기는 끈끈한 결합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음을 재차 확인하는 것이다. 결혼은 부모와의 관계에 변화를 초래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가족 관계를 형성한다. 그러나 단순히 혈연관계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 기존의 관계를 느슨하게 하고 더욱 강력한 관계를 재창조한다는 점에서, 결혼으로 인해 생겨난 관계는 독특하며 유일무이한 특성을 지닌다.
 
 

 

 



 

 

 

결론



 인간이 자신의 가장 내밀한 것을 공유하며 소통하는 가장 우선적인 대상을 만드는 것이 바로 결혼의 본질이다. 그리고 결혼은 동일한 생각을 하는 두 대상이 만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특성은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렇게 서로가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 대해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함께 성장한다. 
 
 성경은 이런 대상을 "에제르 케네그도"라고 표현한다. 사실 아시아권에 사는 우리들은 이것을 더욱 이해하기 쉽게 만들어주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 동양 철학에서 남성은 양(陽), 여성은 음(陰)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음양은 서로가 서로를 향해 동적 평형 상태를 이룰 때에 가장 정상적인 상태에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음은 양이 지나치게 넘치는 것을 억제해 주며, 양은 음이 지나치게 가라앉는 것을 끌어준다. 그리하여 음양이 서로 상호 절제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아담은 잠에서 깨어나 자신의 "에제르 케네그도"를 발견했을 때 그것의 아름다움 때문에 황홀경에 빠진다. 이처럼 성경의 문맥에서 여성의 등장은 세밀한 작업을 통해 표현되는 가장 신비로운 사건이자 클라이맥스이다. 그리고 인간이 자신의 배우자를 만나는 이 역사적인 순간에 모든 것이 거꾸로 뒤집히는 것 같다. 아담은 하와를 보고 사랑의 충격을 받은 것이다. 이 사랑은 옳아 보이는 것은 옳지 않은 것으로, 옳지 않아 보였던 것은 옳은 것으로 만들 만큼 강력하다. 아담이 하와를 보고 외친 감탄사는 인간이 처음으로 연애 감정을 느끼는 충격을 정말 잘 표현해 준다.
 
 그래서 역설적인 순간이 펼쳐진다. 서로 다른 남녀가 만나 혈연관계에 준하는 강력한 결합을 형성한다. 심지어 이것은 기존의 부모와의 관계를 느슨하게 만들 만큼 강력하다. 가족관계를 느슨하게 만들 정도로 강력한 관계가 가족이 아닌 자를 통해서 인생에 들이닥친다.
 
 필자의 생각에 결혼은 모순의 반복이다. 나와 다른 "네게드"가 나에게 도움을 주는 "에제르"가 된다는 점은 모순이다. 가족이 아닌 사람이 기존 가족들보다 더욱 선명한 가족 관계를 만든다는 것도 모순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었을 때에, 그 사람은 비로소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상태의 인간으로 존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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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L. Koehler & W. Baumgartner, THE HEBREW AND ARAMAIC LEXICON OF THE OLD TESTAMENT STUDY EDITION VOLUME I, trans. ed. M. E. J. Richardson, BRILL, 2001, p. 666. [본문으로]
  2. 필립 샤프(Philip Shaff)는 그의 교회사 전집 제5권에서 이 경구가 흔히 메튜 헨리의 독창적인 진술로 오인되어 왔으나, 사실은 중세 가톨릭 학자인 페트루스 롬바르두스의 것임을 명시한다. [본문으로]
  3. L. Koehler & W. Baumgartner, op. cit., p. 164. [본문으로]
  4. Gordon J. Wenham,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1 Genesis 1-15, trans. Yeong Ho Park, Solomon Christian Press, 2006, p. 188. [본문으로]
  5. Ibid. [본문으로]
  6. L. Koehler & W. Baumgartner, op. cit., p. 20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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