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긴 머리와 너울: 기독교는 성차별적인가? (고린도전서 11장 2-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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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긴 머리와 너울: 기독교는 성차별적인가? (고린도전서 11장 2-16절)

바잇 카탄 2024. 7. 3. 21:52

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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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예수교침례회(생명의말씀선교회, 구원파)는 남녀 간의 수평적 관계 보다는 수직적 관계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대침에서 생활하다가 나온 사람들은 성경이 말하는 여성에 대하여 굉장히 보수적인 시각을 갖고 있기 마련이다. 이것은 비단 대침 뿐만이 아니라 성경이 기록된 사회 문화적인 배경이나 저자의 의도 및 글이 쓰여진 맥락을 거의 고려하지 않고 있는 것을 그저 해석하려고 하는 모든 교회들의 공통적인 오류이다.

 

그 중 바울이 여성이 머리에 너울을 쓰고 예배에 참석하라고 권면하는 본문에서 이런 오해는 더욱 극화되는 것 같다. 고린도전서 11장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처해 있던 사회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시대나 환경의 독자가 읽었을 때에 오해할 만한 말들을 잔뜩 늘어 놓는다. 아마 바울은 자신의 글이 고린도 교회가 아닌 다른 이방인 민족들에게 이렇게 큰 논쟁과 고민을 안겨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말하는 부분에 대해서 추가적인 설명을 하지 않는다.

 

학자들의 모든 연구들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많은 극단적인 선생들은 이 본문을 통해 신도들의 생활을 통제하거나 억압하곤 했다. 특별히 고린도전서 11 2-16절은 여성의 지위가 위계상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주장을 옹호할 때에 악용된다. 이미 여성주의(페미니즘) 운동이 전세계 거의 모든 문명에 퍼져 있는 21세기에도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기독교 내에서는 존재한다.

 

실제로 필자는 대침에서 생활할 때에 해당 본문 등을 통해 교회의 자매가 왜 형제에게 순종해야 하는가에 대해 들어야만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여성들은 교회의 대소사를 결정할 때에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형제들이 하는 것들에 다만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일반적으로 여성은 목사가 될 수 없다고 여겨지곤 했다. 그리고 필자 역시 그곳에 있을 때 이런 것들이 옳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바울이 고린도전서의 해당 본문에서 말한 바와 같이 남성은 여성의 머리이며, 따라서 여성은 지위와 신분에서 남성보다 낮은 위치라는 암묵적인 암시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의 해당 본문 외에도 바울이 신약시대의 교회에게 한 남녀 간의 관계에 대한 권면에는 이와 같은 성차별적 요소들이 두드러지는 것 같이 보인다. 다른 곳에서 바울은 여성에게 잠잠하라고 말하며 자신의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말하기도 한다. 여성은 바울의 언어 속에서 마치 남성에게 종속되어 있는 것 같이 묘사된다. 그리고 바울이 초대교회에서 중요한 자리에 있으며 또 그가 남녀 관계를 다룰 때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 등을 언급한다는 점은 이런 바울의 권면들을 신자들이 종교적 명령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필자는 바울이 묘사하는 남녀 관계는 바울 시대의 문화, 사상, 관습을 반영하는 것이며 교리 체계로 수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구약시대 때부터 남녀 간의 규율에 대한 부분은 시대에 따라 달라져왔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권면한 세부적 내용들은 구약성경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것들이다. 또한 바울이 해당 본문에서 사용하는 헬라어 단어들은 그가 말하고 있는 주제가 그의 시대에 한정된 관습을 묘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머리”, “부끄러움”, “영광”, “머리를 미는 것등의 용어를 바울이 사용한 것에 우리는 집중해야 한다.

 

또한 바울이 고전 11:16에서 우리는 그런 관습(συνήθεια; 쉬네떼이아)이 없다.”라고 말하는 부분은 바울이 이것을 교리적인 영역에서 고찰하고 있는 것이 아닌, 관습, 풍습, 관례의 영역에서 다루고 있음을 암시할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교회의 풍습, 관습 등은 시대적 흐름에 따라 변화할 수 있음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의 모든 교회들은 초대교회가 하던 풍습을 그대로 보존하여 지키지 않으며, 이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바울이 권면하는 내용 속에 들어 있는 보편적 핵심 메시지와 기독교적 가치.

 

그러므로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기독교인으로서의 자세에 더욱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것이 아니라 당대의 풍습을 반영하는 표면적으로 드러난 내용에 집중하는 것은 바울의 서신을 정당하게 다루는 것이 아니다. 나는 여기서 사실상 바울은 남성과 여성의 위계적 차별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런 관심이 없으며 여자의 머리에 쓰는 너울에 대해서도 크게 강조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음을 보일 것이다.

 

참고로 필자는 바울이 당대의 남녀 차별적인 환경의 영향에서 자유로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영향들은 그가 사용하는 용어나 유비에서 드러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바울이 남자와 여자를 상당히 평등하게 바라보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다만 그는 몇몇 고린도 교인들이 사회의 일반적인 관습을 지나치게 급격하게 변혁하려는 시도를 하는 것을 경계한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사회 관습을 고린도 교인들이 어느 정도 따라야 한다고 권면한다. 여자들이 머리에 무언가를 쓰고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도 이런 시각의 구체적 적용이다. 마치 바울이 유대인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되고 헬라인에게는 헬라인과 같이 된 것처럼 말이다. 기독교는 기존의 사회를 무질서하게 붕괴시키는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사회 문화적 풍습과 함께 조화롭게 움직일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고린도 교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한 번에 모든 질서들이 철폐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의 주된 관심은 바로 이것을 향한다.

 

 

 

 


 

 

 

 

 

 

고린도 교회와 “명예-수치” 문화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남녀 관계에 대해서 말하게 된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바울의 시대가 현대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는 것을 고려하여야 한다. 현재 신약학자들 대부분이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바와 같이, 바울이 살던 시기는 명예를 얻기 위해 사람들이 무리하게 충돌하고 경쟁하던 사회였다.[각주:1]

 

잘 알다시피,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사회는 어떤 사람의 가치를 평가할 때에 객관적인 지표가 존재한다. 그것은 그 사람의 학력, 직업, 자산 등을 통해 여러 수치들이나 평균과 비교되고 평가 받을 수 있다. 한국 사회는 특별히 이 점에서 탁월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들은 인스타그램 등의 SNS를 통해 남들에 대해 염탐하고 그것과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는 것을 곧 잘 하기 때문이다. 좋은 대학에 가서 좋은 직종을 얻고 좋은 집안 혹은 직업의 배우자를 만나 많은 재산을 축적하는 것은 객관적으로 확인 가능한 것이며 언제든지 비교 가능하다.

 

연애, 결혼을 위한 소개팅 앱 등에 어떤 한 사람의 스펙을 적고 그것으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평가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일상이다. 필자의 아내는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 방송에서는 젊은 남녀 각자가 나이, 직업, 자녀 유무 등을 공개하곤 하는데, 이 때 특별히 많은 관심이 집중된다. 이런 정보들은 그 사람에 대한 이미지를 한 번에 바꿔 놓기에 충분해 보인다.

 

그러나 고대 사회에는 이렇게 객관적으로 확인하고 비교할 수 있는 지표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한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기 위해 공적으로 인정되는 명성, 곧 명예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거의 대부분의 고대인들의 행동 양상은 이런 명예를 추구하거나 방어하는 것에 의해서 그 동기가 결정되었다.[각주:2] 명예를 평가하는 기준은 매우 다양했는데, , 가문, 나이, 교육, 법적인 지위, 체격, 성품, 덕행 등이었다.[각주:3]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의 명예와 상대방의 명예를 비교하고 경쟁하곤 했다. 어떤 사람의 높은 명예는 상대적으로 같은 집단 내의 다른 사람의 명예가 열등하다는 것을 뜻했다. 그리고 이러한 명예는 시시각각 도전 받고 위협 받을 수 있었다. 분명히 고대 사회의 명예는 안정되게 얻은 확정된 위치였던 것은 아니다. 명예를 갖고 있는 사람은 언제든지 자신의 명예가 실추될 수 있는 상황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명예가 실추될 위험에 처해있는 상태의 사람은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적극적인 반격과 대응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실상 이와 같은 태도가 바람직한 것으로 기대되었다. 각 개인은 자신의 명예를 위해 결사적으로 투쟁하고 끊임 없이 선전하여 이것을 공동체에 의해 입증 받아야만 했다. 고대 사회의 영웅주의, 자기 희생 등은 이러한 문화적 배경과 연관이 있다.

 

그래서 종종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는 교만하고, 모욕적이며, 공격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사회적으로 이런 것들이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나온 것이라고 인정받았다면, 그것은 정당화, 합리화될 수 있었다. 간혹 이런 이유 때문에 도시에는 피바람이 불기도 했다. 가문과 가문이 전쟁을 했으며, 명예를 위해 수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바쳤다. 고대 사회는 명성이라는 고급스러운 명분으로 포장된 보복과 야만, 폭력의 시대였다.

 

성경 저자들이 사용하는 영광이라는 용어 역시 이러한 배경에서 적절히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명예는 비추어져야하는 것이며 가시적 광휘성과 가청성을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각주:4] 이것은 성경에서 묘사되는 영광의 특징과 상당히 유사하다.

 

그리고 이런 명예를 지키지 못한 것으로 평가받을 경우, 그 사람은 사회 공동체에 의해 부끄러움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명예는 언제나 수치를 당할 수 있다는 리스크를 안고 간다. 어떤 사람이 뻔뻔스럽게 자신이 명예롭다고 선전하고 또 자신의 명예에 도전하는 사람들 강력하게 밟아버리는 것의 기저에는 그 사람이 수치를 당하고 사회적으로 추락할 수 있다는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었다. 흔히 우리는 이와 같은 것을 현대 사회의 공인들에게서 살짝 엿볼 수 있다. 정치인, 연예인과 같은 사람들은 자신의 사회적 평가, 곧 인기 등을 위해 카메라에 자주 얼굴을 비치고 선전하며 여론전을 한다. 그러다가 간혹 어떤 문제가 크게 터지면, 소위 나락을 가기도 한다.

 

학자들은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 역시 이런 명예와 지위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지는 사람들이었다고 말한다. 특별히 그들은 일반 사회에서 그리 명예롭다고 평가받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많은 고린도 교인들은 주로 상업과 관련된 일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자수성가한 사람은 비천한 출신이다라는 평가를 종종 받았기 때문이다.[각주:5] 또한 고린도 지역 자체가 명예와 관련된 공적인 자랑, 그리고 자기 홍보와 선전이 예술의 경지에 오른 지위 추구의 도시였다.[각주:6]

 

이러한 과도한 명예 시스템은 영광이 비추어져야 한다는 개념 그리고 후견인 관습 등과 적절히 배합되었다. 결국 고린도 교인들이 아볼라, 바울 등을 따르는 당파로 분열된 것은 자신이 따르는 그 대상의 평가에 의해 자신의 명예 가치 역시 결정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고린도 교인들은 일반 사회에서는 자신들의 지위가 낮더라도, 교회 안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기를 원했고 또 추구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에는 고린도 교인들의 명예 추구가 불러온 갖가지 교만하고 논쟁적인 문제들에 대해 바울이 대답하고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애쓰는 것이 종종 등장한다.

 

예를 들어 어떤 이들은 고기나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에 대해 자신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자유로웠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이 이렇게 깨어 있다는 사실을 자랑했고 이것을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과 자신들을 차별화했다. 즉 자신은 그런 것들에 양심이 연약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현대에 적용해보면 이들은 자신들 스스로를 깨어 있는 시민”(소위 깨시민”)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 방식으로 이들은 교회 내에서 자신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가 쓴 초기 영지주의 운동에 대한 다음의 글을 참고하라:

 

초기 영지주의 운동과 배타적인 기독교인: 고린도전서의 신령한 자들과 요한계시록의 니골라당

나는 이전에 대한예수교침례회의 가장 큰 문제는 다른 것 보다도 그들의 배타성에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배타성은 건강한 수준의 신념이나 사상의 배타성이라기보다는 배타성을 위한 배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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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 교인들의 이런 명예-지위 추구는 얼마나 과감하게 사회적 통념들을 무너뜨리고 믿음으로 행동할 수 있느냐로 이어지게 된 것 같다. 그래서 이들은 교회 내의 지위 추구를 위해 사회적 규범들을 붕괴시키고 자신들만의 무리와 자신들만의 독특성을 창조했다. 그들에게 교회는 사회와 다르게 통념과 문화적 경계의 선을 넘을 수 있는 장소였다.

 

이것은 성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고린도 교회는 분명히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었던 성평등의 새로운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을 바깥 사회에서 수용하지 못할 정도로 매우 급진적이고 과격하게 실현하길 원했다. 남성들은 중성적인 신비스러운 옷을 입고 머리를 길게 늘어뜨렸으며, 여성들 역시 머리를 풀어 헤치고 마치 성전 창녀와 같은 분위기로 예언을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사람이 되었으며, 이것으로 인해 교회 내에서 자신들이 (특히 여성들도) 높은 명예-지위를 확보하고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들의 과격한 명예 추구는 사회 통념들을 교회 내에서 급진적으로 무너뜨린 동시에 바울의 사도성을 의심하는 경지까지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교회 내에서 가장 높은 명예-지위를 가진 존재는 사도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아마 사도, 아니면 선지자 급의 탁월하고 특별한 무언가가 되고 싶었을 것이다.

 

이런 움직임의 끝은 결국 무엇인가? 교회 밖의 사람들이 보기에 기괴해 보이는 비정상적인 그룹의 이상한 집단이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회는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사회적 통념과 상식, 그리고 규범과 질서가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이 보기에 이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었다.

 

 

 

“머리”의 제유법과 “영광” 그리고 명예


고린도전서 11 3절에서는 현대 사회에서 보기에 매우 성차별적으로 보이는 본문이 등장한다. 그것은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고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이고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라는 내용의 본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그리스도하나님이 등장한 것 때문에 이것이 시대를 초월한 교리적 명령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것을 통해 추론할 수 있듯이 바울이 사용하는 머리는 명예-수치 문화와 많은 관련성이 있다. 학자들은 헬라어 케팔레(κεφαλή)”가 여기서 무엇을 뜻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는지 많은 토론을 하였다. 어떤 학자들은 이것이 원천을 뜻하는 것이라 주장했지만, 이 같은 해석은 사회적인 배경의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평가를 받았다.[각주:7]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제 이것을 고대의 남녀 관계와 명예-수치 문화와 관련된 제유법으로 사용된 용어라는 것에 동의하는 것 같다.

 

제유법이란 수사법 중 하나로, 어떤 사물의 한 부분을 통해 그 사물 전체를 통칭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 하늘과 땅이라고 언급할 때, 우리는 이것을 보고 문자 그대로 하늘”, 그리고 이렇게 두 가지를 말하는 것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하늘과 땅은 천하 만물을 총괄하여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적은 부분으로 어떤 대상의 전체를 지칭하는 것을 제유법이라고 한다.

 

고린도전서의 머리역시 전체를 가리키는 제유법으로 사용되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왜냐하면 고대 사회에서는 남성이 여성을 대표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고대 사회의 여성은 자신의 신변을 보장받는 것에 있어서 매우 열악한 상태에 있었다. 일반적으로 여성들은 사유 재산을 소유할 수 없었다. 여성들은 분명하게 법적인 사각지대에 있는 사회적 약자였다. 그들이 법적인 어떤 보호를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의 아버지나 혹은 결혼한 남편을 통해서만 권리를 주장해야 했다.

 

그래서 성경에서 과부는 사회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사회적 약자로 매우 빈번하게 등장한다. 왜냐하면 이런 여성들은 법적인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각지대에 있어서 사회의 위협으로부터 그대로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하는 고아역시 이와 비슷한 개념의 연장이다. 현대인들이 이해하는 고아는 부모님 양 쪽이 모두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고대 사회에서 고아아버지가 없는 상태, 곧 집안에 성인 남성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머니만 존재하는 경우에도 고아라고 일반적으로 불렸다.

 

고대 근동 지역의 여성들의 결혼에 대해 살펴보는 것도 그 당시 사회가 남성을 여성의 대표자로 취급하고 있었는가에 대한 좋은 실례를 제공해준다. 여성들은 결혼하는 즉시 거의 일평생을 남성에게 종속된 위치에 머물러야 했다. 즉 결혼 전에는 부친에게 매였고, 아버지가 정해주는 남자와 결혼해야 했으며, 이 때 신랑은 결혼 지참금을 장인어른에게 지급하였는데, 이것은 출가하는 딸의 노동력 상실에 대한 보상의 성격이 강했다.[각주:8] 또한 여성들의 맹세나 서원은 반드시 그녀의 아버지 혹은 결혼한 남편의 동의가 있어야만 효력을 가졌다.

 

남성은 여성이 질병이나 순결 등으로 결혼생활에 문제가 생겼을 때에 이혼증서를 쓰고 마음대로 버릴 수 있었다. 남성들의 이혼 사유는 상당히 주관적이었다. 심지어 요리 솜씨가 나쁘다는 이유로도 이혼이 가능했다.[각주:9] 반면에 여성은 그런 권리를 인정 받지 못했으며 남편이 전쟁 등으로 인해 사망하고 나서야 남성의 종속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 여성에게 더욱 불행한 삶이 기다리고 있음을 뜻했다.

 

여성들은 남성의 법적인 보호를 잃지 않기 위해 여러가지 안전장치들을 마련해 놓고 있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결혼식의 첫날밤에 성관계를 한 후 침상에 묻은 혈흔을 자신의 처녀성을 증명하는 증거물로 간직하고 있어야 했다. 왜냐하면 대개 남성들이 여성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가장 흔한 사유가 순결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여성이 법적인 보호를 받기 힘들었던 이 같은 차별적 상황은 신약시대에 와서도 별반 달라질 것이 없었다. 심지어 어떤 랍비들은 여성에게 기본적인 교육을 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기도 했다. 요세푸스는 여성이 모든 면에서 남성보다 열등하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여성인 마리아에게도 동일하게 가르치신 것은 당시로서는 상당한 충격이다.[각주:10]

 


 

 

이렇듯 고대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을 통해 법적인 권리를 행사하여야 했다. 이런 점에서 고대인들은 남성이 여성을 대표한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바울의 머리용어 사용은 이 같은 배경을 잘 보여주며 바울 역시 이런 환경의 영향을 받았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바울이 여기서 명확하게 수직적인 위계 질서를 의도하고 이것을 사용한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의 유비에서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라고 언급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바울은 남성과 여성이 모두 종교적인 은사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서도 반대하는 것 같지 않다. 그래서 그는 남성 뿐만 아니라 여성들 역시 기도나 예언에 동등하게 참여하는 것을 보고 고린도 교인들을 칭찬한다(고전 11:2).

 

바울의 수평적인 남녀 관계에 대한 시각은 고전 11:11-12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남성과 여성은 서로 상호 보완적인 관계이다(고전 11:11). 서로의 존재가 서로의 존재의 바탕이 된다. 여자가 남자에게서 나왔다면(고전 11:8), 반대로 남성들 역시 여성에게서 나왔다(고전 11:12). 그렇다면 바울이 머리등을 통해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묘사한 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것의 실마리는 그가 고전 11:7에서 사용한 영광이라는 단어에 있다. 이 용어는 바울이 명예-수치의 문화적 배경에서 이 설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즉 이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바울은 분명하게 여성과 남성은 평등한 관계이며 교회 내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조심스럽게 지적한다. 그러나 동시에, 바깥 사회는 아직 그렇지 않는 것을 바울은 알고 있다. 그러므로 당대의 사회 통념상으로는 남자는 여자의 머리이며 또한 여성은 남성의 명예와 관련된다.

 

여성들은 기본적으로 법적인 지위나 권리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 여성의 명예 가치는 대개 그 여성을 소유한 남성의 사회적 평가와 관련이 있었다. 남성들의 지위는 그 남성의 딸이나 아내의 지위 역시 동일하게 존중받고 평가받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 반대도 가능했다. 여성의 품행은 그 여성과 관련된 남성의 명예를 높이기도, 실추시키기도 했다. 이것을 가장 쉽게 드러낼 수 있는 수단은 여성의 옷차림이었다. 로마 제국 치하에서 여성의 옷차림은 분명히 남성의 명예-지위에 영향을 미쳤다.[각주:11] 이 때문에 당시에 여성들의 옷차림에 가장 큰 신경을 쓴 것은 여성들이라기 보다 남성들이었다. 왜냐하면 자신의 어머니, 아내, 딸 등의 품행은 그 남성의 명예, 지위, 영광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여성들은 남성들의 영광이라고 묘사될 수 있었다(고전 11:7). 즉 바울은 여기서 지금 고린도 교인들의 관심사인 명예를 활용해 그들이 알아 듣기 쉽도록 맞춤형으로 설명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을 들었던 고린도 교인들은 머리영광이라는 단어에서 어떤 종교적 함의를 이끌어내기보다 사회의 일반적인 명예 추구와 통념의 시각을 떠올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애초에 그들의 관심사 역시 그것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성의 머리가 남성이며, 남성의 머리는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라는 이 서술은 고린도 교인 맞춤 설명이다. 고린도 교인들은 이 설명을 통해 여성들의 품행이 남성의 명예를 드높이기도 하고, 실추시키기도 한다고 이해했을 것이다. 그리고 바울에 의하면 이런 관계는 여성, 남성의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바울이 집중하고 있는 것은 결국 여성-남성의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어떤 대상의 명예를 높이냐, 실추시키냐의 관계이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1:4에서 바울은 남자의 부적절한 품행은 그 남성의 머리가 되는 대상의 명예를 욕되게 한다고 말한다. 또한 고린도전서 11:5에서 여성의 경우에도 그녀의 부적절한 품행은 그녀를 대표하는 남성의 명예를 실추시킨다.

 

옷차림이나 품행에 대한 명예-지위의 관점에서 수치스러움을 다루고 있음은 고린도전서 11:6에서도 잘 드러난다. 거기서 여성은 머리를 깎거나 미는 것에 대해서 수치스러움을 느끼는 것으로 기대된다. 왜냐하면 이것 역시 당대의 여성에게 일반적으로 요구되었던 옷차림의 관습에서 어떤 여성이 벗어났을 때 그녀가 사회적으로 평가 받을 가치의 실추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재밌는 것은 이렇게 머리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성에게 절대적인 수치스러움을 준다고 바울이 여기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즉 바울은 만약부끄러움이 되거든(ε δ ασχρν)”이라고 언급한다. 이것은 바울이 지금 여기서 다루고 있는 것이 어떤 여성들이 지켜야 할 절대적인 종교적 교리와 관련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것은 오히려 사회적 관습 및 명예와 관련된 문제이다. 여성의 머리를 깎는 것이 그 여성이 스스로 느끼기에 명예를 수치스럽게 하는 것일 수 있고, 혹은 아닐 수도 있다. 즉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바울은 여기서 사회적 시선, 통념, 문화적 관습을 기준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머리에 무언가를 쓰냐 마냐의 문제로 여성들에게 머리를 깎으라고 조언하는 것일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당시 사회의 일반적인 예의 범절과 존중에 대한 것을 알아야 한다.

 

미사를 쓰고 예배드리는 여성

 

 

 

 

 

 


 

 

 

 

 

머리에 쓰는 너울


 고린도전서에 소개되는 머리에 쓰는 너울이 유대 사회에 있었던 얼굴을 가리는 베일과 관련된 것이라는 추측이 초기 학자들에 의해 있었다. 그러나 현재 신약학계는 이것이 그것과는 다른 것이었다는 것을 안다.

 

이 머리에 쓰는 두건은 로마 제국의 문화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고린도 지역은 분명하게 유대-헬라 문화 보다도 로마 문화의 영향을 더욱 크게 받았다는 증거들이 있기 때문이다.[각주:12] 로마 시대에는 귀부인들이 머리에 쓰는 너울 혹은 후드가 매우 중요한 문화적 관행이었다.

 

후드는 로마의 고귀한 품행을 가진 귀부인들이 사용하던 머리쓰개였다. 이것은 그것을 쓰고 있는 여성이 품위 있는 여성이며 따라서 어떤 성적인 유혹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주는 역할을 했다.[각주:13] 또한 이 후드는 그것을 쓰고 있는 여성의 신분과 명예를 존중하고 보호하는 목적도 있었다. 어떤 학자는 만약 로마의 어떤 여인이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고 외출을 한다면 이 여성이 거리에서 추행을 당했을 경우에 로마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고 말한다.[각주:14]

 

현대 사회와는 다르게 고대 사회에서는 시민들의 옷차림이나 장신구 등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 기호 체계로서 기능했다. 옷차림은 계층, 스타일, 품위, 자기 홍보, 태도 등 무엇이든 알려주는 표지로 작용했다.[각주:15] 학자들은 이 당시 여성들이 쓰고 다녔던 머리쓰개가 명예, 성적 절제, 자기 통제를 나타내는 인식표에 해당한다고 결론을 내린다.[각주:16]

 

그리고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이런 사회적 관습에서 매우 빠른 속도로 탈출한 것 같다. 고린도 교회는 상당히 성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였기에 남성 여성을 따지지 않고 예배를 인도하거나 예언을 하는 것이 가능했다. 바울은 이것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는다(고전 11:2). 다만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사회적 통념이 정하는 남녀에 대한 시각의 차이와 모든 구별을 전부 폐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것은 사회와 단절되는 것이며 외부인들이 보기에 굉장히 낯설고 기괴하게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교회 밖의 일반적인 사회인들에 의해 미친 사람들처럼 보이길 원하지 않는다(고전 14:23). 만약 어떤 여성이 예배를 주도하면서 머리에 무언가를 써서 머리카락을 가리지 않는다면, 외부인들이 보기에 이것은 그 여성이 공공장소에서 자신을 성적인 대상으로 여겨도 괜찮다는 사인(sign)을 보내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각주:17]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보이느니 차라리 머리를 자르라고 조언한다. 왜냐하면 당대 사회에서 어떤 여인이 머리를 자르는 것은 그녀가 여성성을 잃어버린 것과 동등하게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각주:18] 머리카락을 가리는 것은 성적 욕구에 대한 자기절제와 그 사람의 품위를 보여주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머리카락을 아예 짧게 자르는 것은 독신이나 성적 욕구가 없음과 관련이 있었다. 이것은 사회인류학자들 역시 인정하는 배경이라고 한다.[각주:19]

 

그러므로 바울은 예배를 인도하거나 공공장소에서 예배를 드리는 여성들이 사회적 시선을 아예 무시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녀들은 사회적인 관습과 통념을 존중하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그녀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를 따르기 때문에 이제 이런 제약에서 모두 벗어났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어느정도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만을 생각한 이기적인 사고관이다. 이것은 타인이나 사회 공동체가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대해서는 전혀 배려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타인의 연약한 양심을 생각하고 배려하기 때문이다(고전 8:13).

 

만약 여성 예배자가 성적인 절제와 관련한 평가에서 사회적인 오해를 받지 않으려 한다면 문화적 관습을 존중하여 머리에 후드를 쓰거나, 아니면 머리를 짧게 잘라 자신은 그런 의도가 없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사회는 이런 것들에 순응하고 조화롭게 어울리는 사람을 좋게 평가할 것이다. 이것은 공공질서, 즉 에티켓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다. 기독교인들은 사회에서 벗어난 유별난 인간이 되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그들은 사회에서 소금이 되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삶을 사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바울의 이런 시각은 비단 여성들에게만 향하지 않는다. 남자들이 머리를 가리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것은 그 남자의 머리가 되는 그리스도를 명예롭게 하지 못하는 행동이다(고전 11:4). 학자들은 이것이 남성들의 긴 머리 헤어스타일을 지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각주:20] 당대 사회에서 남성이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있는 것은 부적절하게 여겨졌다. 어떤 헬레니즘적 유대인은 남성들이 머리를 길게 하고 머리를 땋는 것에 대해 불만을 표시한다. 왜냐하면 당시에 만연했던 동성연애와 이것이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각주:21]

 

남성이 여성과 같은 헤어스타일(긴 머리)과 어떤 중성적인 복장을 입고 예배를 드리거나 하는 것은 동성연애가 만연해 있던 사회에서 성적인 대상으로 여겨지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동성애자 남성들을 자극할 수 있었을 것이다.[각주:22] 물론 현대 사회에서 어떤 남성이 머리를 길게 하고 있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바울도 남성의 머리 길이에 대해서는 가치중립적으로 반응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시선은 그렇지 못하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런 것들을 존중해야 한다.

 

만약 고린도 교인들이 이런 사회적인 관습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을 보면서 그들이 섬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욕할 것이다. 즉 고린도 교인들이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 하자면, 그들의 자유로운 무질서한 행동 때문에 그리스도의 명예가 실추되고 그들이 섬기는 대상이 수치스러운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성역할에 대한 바울의 사상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알기 쉽도록 머리라는 제유법을 통해 그들이 성적인 것에 대해 사회적 관습을 따르지 않는 것이 명예의 문제에 있어서 수치스럽게 하는 원인이 된다고 주장했다. 바울은 여기서 더 나아가 성의 구별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각 사람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바울에 의하면 이것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본성이 가르치는 것이다(고전 11:14). 왜냐하면 남자와 여자의 구별은 하나님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는 남자만 있지도 않고, 여자만 있지도 않다(고전 11:11-12). 남성과 여성의 성평등은 기독교 세계에서 매우 중요한 미덕이지만, 이들의 성구별은 유지되어야 한다.

 

이런 구별들을 평등이라는 이름 아래에 모두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바울이 지향하는 바와는 다르다. 남자가 긴 머리를 가지고 있는 것은 그 사람 스스로의 가치를 떨어뜨리지만, 여성이 긴 머리를 가지고 있는 것은 그 여성의 가치를 높인다(고전 11:14-15). 그리고 이런 구별을 유지하여 자신의 품위를 손상시키지 않는 것 자체가 자신들이 섬기는 대상(하나님)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전 11:10).

 

머리에 무언가를 쓰느냐의 여부는 분명 로마 제국의 문화 관습과 관련이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사회 통념에서 더 보편적인 원리, 곧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서 남성과 여성은 구별되는 특성이 있다는 원리를 도출해낸다. 고린도 교인들이 남녀 구별을 따르는 것은 단순히 로마 제국의 사회적 분위기를 따르는 것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존재할 수 있게끔 만든 창조주의 영광을 드높이는 것에 해당한다.

 

바울의 이러한 입장은 성차별과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다. 즉 바울은 여성과 남성의 수직적인 위계질서에 대해 주장하지 않는다. 혹은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또는 여성이 남성과는 다르게 어떤 예배를 이끌지 말아야 한다거나 교회의 어떤 결정에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여성들이 예배시에 공적으로 기도하고 예언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지 않았으며, 고린도 교인들이 여성을 이런 활동에 참여시키는 것을 바람직한 것으로 보고 칭찬하였다.

 

반면에 바울은 남성과 여성이 서로 구별되고 남성다움여성다움의 영역에 머물러야 진정한 가치를 누린다고 여기는 것 같다. 이것은 현대에 남성과 여성이라는 구분을 제거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느끼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바울은 성평등은 지지하지만, 성별의 혼동이나 성역할의 폐지에는 찬성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렇게 성적으로 구별되고 사회의 일반적인 통념을 따르는 것은 중요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아야 하는 점에서 권장된다. 이 점에서 바울은 현대의 과격한 페미니즘 운동의 급진적 움직임에 반대한다. 현대 사회는 많은 지점에서 이미 남성과 여성의 평등한 관계가 보편적인 것으로 수용된다. 사회 통념적으로도 이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어떤 과격한 페미니스트들은 의도적으로 여성성을 제거함으로써 사회의 일반적인 시선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여성성을 나타내는 거의 모든 요소들을 혐오하며 그것과 정확히 반대로 하려고 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들의 이러한 과격함은 사회의 일반인들의 시각에서 봤을 때에도 상당히 급진적이고 때로는 불쾌하다. 마치 고린도 교인들이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명목으로 성역할의 기준을 급진적으로 지워버리려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런 급격한 변화는 기독교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바울의 시대에는 아직 성평등에 대한 사상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이다. 그런데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그 태동에서부터 상당히 성평등 친화적이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모든 제도적 문화적 인종적 제약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바울 역시도 갈라디아서나 로마서를 통해 이런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아직 사회적 입장은 그렇지 못하다. 만약 고린도 교인들이 성평등을 외치면서 모든 기준을 갑자기 없애 버린다면, 외부인들이 보기에 이것은 엄청난 무절제와 성적 방종을 지향하는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추구하는 명예를 지키는 것과는 하등 상관이 없다. 오히려 그들 스스로의 가치를 깎아 먹게 만들 것이다. 더욱 나쁜 것은 그들의 행동으로 인해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욕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들이 실추시키는 것은 자신들의 명예만이 아닌 것이다.

 

또한 이러한 성역할의 구별은 사회적 시선 뿐만 아니라 자연스러운 세계의 질서이기도 하다. 성평등이 보편적으로 인정받고 익숙해진 우리 현대 사회에도 여전히 인간은 남성과 여성이 존재한다. 대부분의 인간은 선천적으로 성이 정해지고 그렇게 태어나서 그렇게 생활한다. 여성과 남성이 동등하다는 사실이 여성과 남성 간의 모든 차이를 제거하는 것은 아니다. 남성은 여전히 강인하고 안정적이고 듬직한 책임감을 요구 받을 것이고 여성은 단정함과 아름다움과 섬세함을 요구 받을 것이다.

 

그리고 바울에 의하면 이것을 유지하고 가꾸는 것은 남성과 여성 각자 스스로의 명예를 높이는 것이다. 즉 각자의 성역할에 충실한 것은 각자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고 각 개인이 좀 더 품격 있는 사람으로 존재하게 되는 비결이다. 시대가 바뀌고 사회가 바뀌더라도 남성과 여성이 생물학적으로 다르다는 점은 여전히 남는다.

 

이 점에 대하여 어떤 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남자들로 말미암아 여자들이 더욱더 여자인 것과 같이, 여자들로 말미암아 남자들도 더욱더 남자다. 그리고 사람으로서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존재라는 것을 표현하는 신적 속성을 나타낸다.”[각주:23]

 

 

 

 

 

 


 

 

 

 

 

결론


 고린도 교회가 처해 있던 당시 사회 문화적 상황이 명예-수치와 관련된 것이었다는 것을 알고 나면, 바울이 사용하는 용어들이 남성과 여성 간의 수직적 위계질서나 여성들이 교회에서 어떤 직무를 맡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려고 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오히려 사회인들의 시선에 비춰질 교회의 모습, 평판과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즉 바울은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당대의 사회 관습을 따라가는 것을 선호한다. 바울이 보기에 고기를 먹느냐의 문제, 머리에 무언가를 쓰느냐의 문제는 기독교의 핵심 본질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사회적 관습을 따르거나 다른 연약한 신자의 양심을 손상시키지 않는 선에서 적절히 조심해야 할 문제다. 교회는 사회와 분리되어 있는 곳이 아니며 사회와 조화되고 소금의 역할을 하는 곳이다.

 

그렇다면 '남녀의 성에 대해서'는 무엇이 남는 것인가? 바울이 보기에 이것은 위계질서가 남는 것은 아니다. 그가 사용하는 머리”, “영광이라는 용어는 로마 제국 치하의 고린도 교인들이 알아듣기 쉽게 명예와 관련하여 설명한 것 뿐이다. (물론 뒤의 머리에 쓰는 것이라는 요소 때문에 사람들이 이 머리를 물리적인 신체로 오해하게 된 것 같다.) 오히려 바울이 보기에 그것의 핵심은 남성과 여성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남성이 머리에 무언가를 쓰지 않아야 한다는 규범이 말해주는 것은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것이 아니다. 또한 여성이 머리에 무언가 써야 한다는 관습이 말해주는 것은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은 다른 기준에 의해 자신의 가치가 설정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분명 성차별적인 환경에서 자라왔다. 아마 그는 성평등에 익숙한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고린도 교회의 여성들이 기도나 예언을 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지 않는다. 반면에 디모데전서에서 그는 여성들의 권한을 제한하는 것 같다. 나는 이런 것들을 기독교의 보편적 가치로 설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바울은 분명 자신이 살던 시대의 사회적 상식과 통념을 존중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여기서 교회가 무질서하게 벗어나는 것을 원하는 사람이 아니다.

 

머리에 무언가 쓰는 문제를 논하는 지점에서 이런 문화 배경적인 면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바울이 성차별적인 발언들을 한 것에 대해서 우리는 그것을 종교적인 규범으로 받아드려서는 안 된다. 그런 본문들을 활용해서 남성의 우월성을 옹호하거나 여성의 열등함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

 

심지어 바울이 디모데전서 2장에서 아담 하와의 이야기를 가져와 여성의 권한을 제한하는 것에 근거로 활용하는 것도 남성과 여성의 수직적 관계나 여성이 교회 내에서 목회를 하는 것에 대한 반대를 지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울은 창세기 내러티브가 말하는 인간의 죄로 인해 저주받은 상태의 남녀 관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창세기가 말하는 이상적인 남녀 관계는 평등적이며 상호보완적이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가 쓴 다음의 글을 보라:

 

창세기 2장 하와의 창조: 여성과 기독교적 결혼의 의미 (창 2:18-24). Meditation on Genesis 2:18-24

2024년 현재 한국 사회는 혐오의 사회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세대, 지역, 정치 등의 갈등이 현시점에서는 거의 최고조에 이르러 있다. 그중에서도 단연 가장 큰 갈등의 주제를 따지자면, 특히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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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러한 저주받은 남녀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통해 점점 회복될 것이다( 3:15; 딤전 2:15). 바울도 하나님 나라의 이러한 확장과 남녀관계의 이상적 회복을 바라보는 것 같다(딤전 2:15). 그러나 아직 그가 살던 시대에는 여성이 지켜야 할 것들이 사회 통념상 요구되었다. 그리고 교회는 이런 기대와 요구들에서 지나치게 벗어나 좋지 않은 평판에 노출되기까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현대에 바울이 다시 와서 남성과 여성에 대해서 조언을 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그는 남녀 차별적인 발언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여성이 목회자가 되는 것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여성이 가르치는 자리에 있는 것이나, 남성의 권한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해서 그는 문제 삼지 않을 것이다. 즉 그는 여성이 머리에 무언가를 쓰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바울의 시대에 통용되던 사회 관습과 관련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그는 어쩌면 교회가 사회 통념에서 벗어나는 비상식적이고 괴상하며 반사회적인 일을 하는 것을 봤을 때 이것에 더욱 집중할 것 같다. 왜냐하면 바울의 원칙들은 언제나 그것이 기독교 핵심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면 사회와 조화를 이루는 방향을 향하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교회가 사회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상식적이지 않은 자신들만의 이상한 관습을 가지고 있다면 바울은 이것에 반대할 것이다. 그런 교회에게 바울은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관습이 없다.”라고 말할 것이다(고전 11:16). 오히려 그들은 사회의 상식에 맞게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항상 타인의 유익을 위해 일해야 한다. 이것은 타인의 양심을 위해 기독교인들이 존중하고 배려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비본질적인 문제에 있어서 기독교인들은 이상한 고집을 부려서는 안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여성이 목회자가 되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이 말이다. 여성이 교회에서 주요한 위치에 오르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 가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것이 기독교의 본질을 공격하고 약화시키는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마 바울도 그렇지 않다고 동의할 것이다. 요즘 시대에 여성에게 잠잠하고 조용하며 순종함으로 배우기만 하라고 말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단 말인가? 그것은 오히려 21세기의 사회 통념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교회는 좀 더 상식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우리 사회의 여성과 남성은 동등하며, 이 말은 곧 여성이 남성이 하는 모든 일에 참여할 수 있음을 뜻한다.

 

기독교는 비본질적인 것을 위해 사회의 상식에서 벗어나는 것을 하려고 노력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비본질적인 것들을 기꺼이 놓아주어야 한다. 그런 것들은 사회와 조화되는 방향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가톨릭이 미사포를 착용하고 미사를 드리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만약 여기서 남녀 차별적인 원리를 이끌어내려고 한다면 그것에는 반대할 것이다.)

 

보수적인 교단이나 이단들은 바울의 시대 상황을 반영하는 이러한 본문들의 표면적인 것에 집착하여 바울이 정말 말하고자 하는 핵심 진리를 놓친다. 사실 바울은 여기서 남녀 관계에 대해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각 개인이 타인의 양심을 배려해서 행동하는 이타적인 마음에 대해 관심이 있다. 그런 마음은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자기 유익을 위해서가 아닌 타인의 유익을 위해서 행동하도록 만들 것이다.

 

즉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분투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과 관련된 사람들의 명예, 주변인들의 명예, 타자의 명예를 위해 움직여야 한다. 어떤 여성이 자신의 남편 등의 명예를 생각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머리를 풀어헤치며 예언하는 것에 대해 바울은 의아해 한다. 이런 여성의 행동은 자신 뿐만 아니라 자신과 관련되어 있는 사람의 평판까지도 떨어뜨릴 것이다. 더욱 궁극적으로는 기독교인들이 섬기는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과연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참된 자세일까?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자의 머리에 쓰는 너울에 대한 본문을 보면서 성차별에 대한 내용을 끄집어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하기 위해 자신의 품위를 유지하는 것에 대해 배워야 한다. 어떤 기독교인 혹은 목회자는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면서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이 같은 것들을 경계해야 한다는 교훈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공무원이나 전문직은 그 직종에 대한 법률에서 품위유지의무와 관련된 법 조항이 있다. 왜냐하면 이런 직종을 가진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높은 인품과 국민의 신뢰를 받을 만한 윤리 의식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우리 기독교인들도 사회에 대하여 마치 이런 직종들과 같이 행동해야 한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일탈을 해서는 안 되며, 상식에 어긋나거나 품위를 손상할 만한 일을 해서는 안 된다. 혹 그것이 가치중립적으로 보이는 일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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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ohn M. G. Barclay, Paul and the Gift, trans. Il Song, Holy Wave Plus Publishing Company, 2019, 726. [본문으로]
  2. Ibid. [본문으로]
  3. Ibid. [본문으로]
  4. Ibid., 727. [본문으로]
  5. Anthony C. Thiselton,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trans. Ji Cheol Sin, Holy Wave Plus, 2022, 62. [본문으로]
  6. Ibid., 63. [본문으로]
  7. Anthony C. Thiselton, op. cit., 1424. [본문으로]
  8. 『성경문화배경사전』, 14. [본문으로]
  9. 『성경문화배경사전』, 49. [본문으로]
  10. Darrell L. Bock, Luke 9:51-24:53, trans. Gi Cheol Sin, Revival & Reformation Publishing, 2017, 134-135. [본문으로]
  11. Anthony C. Thiselton, op. cit., 1395. [본문으로]
  12. Anthony C. Thiselton, op. cit., 1393. [본문으로]
  13. Ibid. [본문으로]
  14. Ibid. [본문으로]
  15. Ibid., 1394. [본문으로]
  16. Ibid. [본문으로]
  17. Ibid., 1438. [본문으로]
  18. Ibid., 1439. [본문으로]
  19. Ibid. [본문으로]
  20. Ibid., 1431. [본문으로]
  21. Ibid. [본문으로]
  22. Ibid. [본문으로]
  23. Ibid., 144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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