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영지주의 운동과 배타적인 기독교인: 고린도전서의 신령한 자들과 요한계시록의 니골라당 feat. 대한예수교침례회(생명의말씀선교회) 구원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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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영지주의 운동과 배타적인 기독교인: 고린도전서의 신령한 자들과 요한계시록의 니골라당 feat. 대한예수교침례회(생명의말씀선교회) 구원파

바잇 카탄 2024. 2. 2. 23:05

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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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이전에 대한예수교침례회의 가장 큰 문제는 다른 것 보다도 그들의 배타성에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배타성은 건강한 수준의 신념이나 사상의 배타성이라기보다는 배타성을 위한 배타성, 곧 무익한 변론으로 분쟁을 일으키고 일반적인 교단들과 갈라서는 분열의 씨앗이 되는 극단적 배타성이다. 그리고 이 배타성의 배후에는 "나는 제대로 안다", 곧 "나는 다르다, 나는 특별하다"라는 망상이 존재한다. 이 망상은 어떤 특정 교리, 사상을 알아야 한다는 개념과도 강력하게 결합되어 있다.

 

 예를 들어 대침은 영원한 속죄의 교리를 깨달아야 구원이라는 가르침이 있다. 이전에 내가 썼던 글에서 밝혔던 바와 같이, 대침이 주장하는 이 말의 의도는 속죄의 효력이 영원하냐 아니냐에 초점을 맞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속죄라는 사실에서 나의 구원이 이미 완성되었다는 확신을 이끌어내는 것에 의도가 있다. 따라서 대침의 이 기준대로라면 자신의 구원이 이미 완성되었다고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은 복음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것이며, 구원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이며, 영원한 속죄의 교리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각주:1]

 

 즉, 대침은 "구원이 이미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느냐 못 깨닫느냐, 이것에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있느냐의 문제에 집착한다. 이들이 이것을 기준으로 일반 교단의 신자들을 시험하는 것은 이들에게 이 특정 교리를 아는 것이 구원을 판가름하는 시금석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 특정 사실을 아는 것은 대침 사람들이 자신들을 타 교단의 "이방 교회", "세상 교회"들과 구분하는 주요 경계선이다.

 

 이처럼, 구원파 외에도 기독교 세계 내에서 어떤 특정 교리를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스스로 다른 기독교인들과 차별점을 두고 배타성 속으로 숨어 들어가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이들의 이런 태도는 대개 남들과 자신은 다르며, 남들이 깨닫지 못하는 어떤 특별한 가르침을 자신은 지니고 있고, 그러므로 자신은 탁월하다는 생각으로 발전한다. 이 양상은 일전에 내가 썼던 글인 "대침을 탈출한 분들이 주의해야 할 유형들"[각주:2]이라는 글과도 관련이 있다. 사실 대침의 배타성 역시도 이런 "나는 남들보다 더욱 낫다"라는 교만한 사상과 관련이 있다.

 

 어떤 특정 교리를 아는 것을 통해 자신이 다른 기독교인들 혹은 다른 기독교 교단들과 다르다는 이 망상은 초대 교회에서는 영지주의 운동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내가 여기서 언급하는 "영지주의"는 2세기 발렌티누스가 정립한 정교한 체계의 영지주의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발렌티누스가 영지주의 교리의 토대를 세우기 이전, 아직 영지주의가 중심성을 확보하기 이전의 "영지주의 운동"의 상태로 존재했던 미묘한 시기의 초기 영지주의를 뜻하는 것이다. 곧 고린도전서, 골로새서, 디모데전서, 요한일서,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아주 초기의 영지주의의 흔적들을 말한다. 이것에는 소위 "니골라당의 교훈" 역시도 포함된다. 이번 글에서는 학자들에 의해 영지주의로 점차 변해간 사상들로 여겨지는 초기 영지주의 운동에 대해 추적하면서, 이 운동의 정신, 곧 "나는 특별한 지식이 있다"라는 사상이 배타적인 기독교인들의 태도와 어떤 공통점이 있는가에 대해 살펴보겠다.

 

 

 

 


 

 

 

 

영지주의 운동의 주요 특성


 흔히 영지주의 하면 떠오르는 것들을 생각해 볼 때, 영과 육의 이원론, 그노시스, 데미우르고스 등을 떠올린다. 이런 개념들은 2세기 영지주의자인 발렌티누스가 정립한 것들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학자들은 발렌티누스를 영지주의자들의 아버지라고 부르면서도, 영지주의 운동 자체가 발렌티누스에게서 최초로 기원한 것은 아니라고 여긴다. 영지주의 운동은 교리 체계가 정립되기 전부터 존재해 왔으며, 사도 바울과 사도 요한의 시대에도 기독교 교회와 함께 존재했다.

 

 윌리스턴 워커는 영지주의를 정의할 때에 통일된 방식으로 결론을 내리기 힘들다고 말하며, 그 이유는 영지주의가 "특수한 가르침들이라기보다 지성의 공상적인 습성이라고 해야 가장 좋을 내용과 결합된 '세상 거부'라는 종교적 분위기"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각주:3] 즉 영지주의는 어떤 통일된 현상이 결코 아니며, 기독교 교회와 독립적으로 함께 존재한 배타적인 사상운동의 성격이 강했다. 

 

 이 외에도 영지주의는 비밀스러운 가르침, 신비로운 지식의 전승이라는 특징도 가지고 있으나, 영지주의가 운동의 성격을 넘어 이단 종파의 형태로 자리 잡으면서 이 같은 점들이 뚜렷해진 것 같다. 오히려 영지주의의 가장 핵심적 양상은 특별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세계를 이원적으로 인식하면서 주변 사회와 배타적으로 갈라서는 것이다. 사실 이 같은 움직임은 기독교 시대 이전의 그리스 철학의 사상 안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소위 넓게 정의될 수 있는 "영지주의화"의 경향성은 중기 플라톤주의 전승들 안에서 분명하게 존재했다.[각주:4] 후대의 발전된 영지주의와 구분되는 "영지주의 궤적"들이 이미 기독교 이전에도 존재했다.[각주:5]

 

 필립 샤프는 영지주의의 사상에 대해 말하면서, 이것이 "지혜에 대한 병적인 자부심이자 교만하고 야심이 깔린 지식으로서, 이것은 덕을 세우기보다 허물고(고전 8:1), 한가한 교활함과 논쟁을 일으키며, 그 과정에서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롬 1:22)라는 사도의 말을 입증"한다고 말한다.[각주:6] 영지주의자들은 "그노시스", 곧 "지식"이라는 단어로 자신들을 "신앙주의자들(Pistics)", 곧 대다수의 일반적인 그리스도인들과 구분했다. 또한 그들은 스스로를 지적인 귀족이라 여겼으며, 교회 내에서 더 높은 계층을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하고 자랑했다.[각주:7] 이 같은 배타성은 점차 발전하여 이런 신적인 지식이 있어야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여기는 데까지 나아갔다.[각주:8] 이들의 "특별한 교리의 깨달음"은 비밀 종교와 대중 종교를 구분하는 비기독교적인 태도를 유발하고 기독교의 겸손과 사랑의 덕에 직접 상충되는 지식의 자부심을 낳았다.[각주:9]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영지주의는 방탕한 반(反)율법주의 사상이 주요 특징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영지주의 운동에서 금욕주의와 반(反)율법주의가 모두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렇게 양 극단의 사상이 함께 나타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영지주의자들의 강조점이 자연적인 것과 대비되는 영적인 지식, 곧 천상적인 특별한 무언가를 끊임없이 추구해야 한다는 이원론적인 사상에 있기 때문이다.[각주:10] 만약 오직 초월적인 영적인 지식만이 탁월한 것이며, 그 밖의 것들은 열등하다면 육적인 것은 모두 악하고 영적인 것은 모두 선하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물질이 악하다는 관념은 초반에는 모든 세상적인 것들, 육신적인 것들을 회피하는 금욕주의로 나타나기 쉽다. 그러나 이 사상의 극단적 발전은 육적인 것은 허상이며 아무것도 아니므로, 이것들이 영적인 것에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사상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신적인 지식을 소유한 자는 온갖 더러운 것들로부터 아무런 영향 없이 순결할 것이다.

 

 금욕적 영지주의는 후에 마르키온, 사투르니누스, 타티아누스, 마니교와 같은 염세주의자들의 종파로 이어졌다. 금욕적 영지주의 운동은 물질로부터 비롯된 육체를 혐오하고 몇몇 음식들과 혼인 및 부부관계 등을 죄악 된 물질로 자신을 더럽히는 행위로 간주하면서 금지했다. 즉, 물질과 죄를 혼동했으며, 하나님께서 지으신 물리적 세상까지도 혐오하여 그것과 구별되려고 노력했다.[각주:11] 사도 바울이 골로새서 2장과 디모데전서 2장 및 3장에서 경계한 주요 거짓 선지자들이 바로 이들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각주:12]

 

 반면에 방임적인 영지주의 운동은 니골라당, 배사교, 카르포크라테스파, 안티탁테스파 등을 통해 발전되었다. 이들은 영혼은 물질보다 우월하기 때문에 육체의 정욕에 몰입하는 것을 통해 모든 육적인 것들이 초월 가능하다 여겼다. 따라서 충격적 이게도, 정욕을 억제하기보다 정욕을 탐닉하면서도 그것에 정복되지 않는 것이야말로 위대한 것이라 생각했다.[각주:13] 필립 샤프가 소개하는 에피파니우스의 이들에 대한 묘사는 인용하기 민망할 정도로 성적이며 방탕한 악마적 내용들이 많다.

 

 물론 이 두 가지의 극단적인 양상은 영지주의가 보다 발전된 뒤에 선명하게 나타난 것들이며, 초기에는 이런 극단화를 예견하는 경향성을 보였을 가능성이 클 것이다. 그리고 영지주의 운동의 윤리적 양극성은 이들의 이원론적인 관념의 배경이 되는 분리주의적 특성, 곧 "영적인 지식의 깨달음"을 통해 경계선을 긋고, 이 영역 밖의 세계를 배척하고 열등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성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무수히 많은 영지주의 운동 속을 관통하는 핵심적 원리인 "어떤 교리적 지식을 배타적으로 강조하여 분리됨"의 특성에 마땅히 주목하여야 한다.

 

고대 고린도 도시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초기 영지주의 경향성


 초기 영지주의로 나아가는 경향성은 사도 바울의 고린도전서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 중에는 소위 "지혜 있는 자들", "하나님의 신령한 것을 아는 자들", "지식이 충만한 자들"이라고 스스로를 지칭하는 교만한 자들이 있었다. 이들이 일반 평신도들과 자신들을 구별 짓고 고린도 교회 내에 분열을 가져오면서 여러 당파를 만들어 분쟁하였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바울은 이들의 극단적인 주장에 반박하기 위하여, 이들의 논지 중 "영적인 신령한 지식"이라는 주제를 차용하여 각색해 설명한다(고전 2:6-16). 

 

 그런데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소위 "지혜 있다 하는 자들"의 교만한 용어를 사용하여 논증하는 부분이, 후대의 영지주의자들에 의해 그들의 논증을 옹호하기 위한 본문으로 활용되었다. 왜냐하면 바울이 차용한 용어들이 영지주의자들 자신들의 용어와 잘 부합하였기 때문이다. 이레나이우스는 발렌티누스파가 "세 부류의 사람들 ... 곧 물질(육)에 속한 사람 ... 중간 계층의 '혼에 속한 사람' (ψυχικός; 프쉬키코스), 신령한 계층에 속한 신령한 사람(πνευματικός; 프네우마티코스)"의 삼분법을 지지하기 위해 고린도전서 2장 14절을 오용한다고 말한다.[각주:14] 발렌티누스파가 해당 본문에서 그런 용어들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고린도 교회에 이미 나중에 성숙한 영지주의로 발전하게 될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각주:15] 고린도 교인들의 이런 미숙한 철학적 용어의 사용은 동시대의 필론과 요세푸스의 저서에서 인간을 몸(σῶμα; 소마), 혼(ψυχή; 프쉬케), 영(πνεῦμα; 프네우마)으로 분류하여 설명하는 삼분법의 영향이 있었을 수 있다.

 

 이 점에 대해 피어슨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린도에 있던 바울의 논쟁 상대자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베풀어주신 πνευματικός(프네우마티코스)의 특성으로 인해 자신들 안에서 πνευματικοί(프네우마티코이)가 될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그들은 지혜를 배움으로써 자신들이 세상적이며 '혼적인' (psychic) 존재의 차원을 넘어설 수 있으며, 하늘의 영광을 기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각주:16] 또한 고린도 교인들은 이것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들이 이미 그러한 상태에 도달했으며, 스스로를 "어린아이"와 반대되는 τέλειοι(텔레이오이; 성숙한 자들, 완전한 자들)로 이해했다.[각주:17] 이것은 "영적인 지식"이라는 특별함이 "영적인 신분"에 대한 개념으로 우리를 안내하는 것을 보여준다.

 

 고린도의 "신령한 자들"이 당파를 만들면서 사도들의 권위에 도전했던 것은 이런 교만한 태도의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소위 "영적인 지식"을 깨닫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는 모든 목회자들을 배제하였다. 따라서 교회의 공동체적인 사역이 이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따르는 가르침의 실현, 곧 자기 긍정을 위해 복음 사역과 교회는 존재해야 했다.[각주:18] 그래서 어떤 이는 베드로가 우위에 있다고 말하고, 다른 이는 아볼로가 더 낫다고 했다. 혹은 자신을 "그리스도 파"에 분류하여 이 모든 교인들과 구별되려는 자들도 있었다.

 

 또 이들은 자신들이 완전하며, 왕적인 신분을 이미 얻었다고 확신했다. 고린도전서 4장 8절에서 바울은 이에 대해 신랄한 어조로 말한다. 고린도의 "신령한 자들"은 자신들이 종말에 얻을 왕적인 지위를 이미 얻었기 때문에, 그들은 왕이며, 성령 안에 있으며, 모든 것에서 해방되었고 따라서 자기 주변에 있는 다른 평범한 교인들보다 전적으로 우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각주:19] 신약 성경에 전반적으로 퍼져있는 "이미와 아직"의 종말론적 시각이 고린도의 "신령한 자들"에 의해 왜곡된 것이다. 바렛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잘 요약한다: "고린도 교인들은 마치 앞으로 도래해야 할 시대가 이미 완전히 성취된 것처럼, 그리고 성도들이 이미 나라를 얻은 것처럼(단 7:18) 행동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실현된 종말론의 '이미' (already)를 한정할 '아직 아니다' (not yet)가 없다."[각주:20] 이것은 이미 얻었다는 자의적 확신과 교만이 배타성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빌켄스 역시 고린도 교인들의 "실현된 종말론"과 관련하여 "더 높은" 차원에서 영지주의자들은 "심판을 이미 통과했다"라고 여겼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것은 영지주의가 기원후 55년 무렵부터 이미 존재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고린도 교회에 그런 경향성이 퍼져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각주:21]

 

 이제 우상의 제물을 말하는 대목에서, 고린도 교인들이 주장하는 "지식", 곧 γνῶσις(그노시스)가 그들의 교만한 주장의 원인으로 등장한다.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이 우상의 제물에 대한 γνῶσις가 있다고 말하면서 우상은 아무것도 아닌 허상이므로, 제물을 먹는다고 해서 어떤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지식"이 없는 일반 평신도들을 깔보면서 자신들의 우월성을 과시하고 스스로가 특별함을 자랑했다. 바울은 이 "지식"이 그들을 교만하게 만든 것으로 파악한다(고전 8:1). 

 

 사실 바울은 "지식" 자체를 배격하는 입장은 아니다. 실제로 고린도 교인들이 지적한 내용대로, 바울은 우상이 아무것도 아님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고전 8:4-6). 그러나 바울은 이 "지식을 소유함"을 근거로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구별하고, 자신들이 참으로 영적인 것을 깨달았다고 주장하는 교만한 행동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런 교만함은 대개 자기 자신의 위치와 안위만을 생각하고 타인의 기분이나 생각은 별로 존중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고린도의 "신령한 자들"은 지식을 사랑이 없는 형태로 다른 교인들을 향해 마구 휘두른 것이다(고전 8:7-13).

 

 심지어 이 "지식"은 헛되고 무익한 변론과 관련이 있었다. 앤서니 C. 티슬턴은 고린도 사람들이 주장했던 지식은 "영지주의적이며 비현실적인 색채를 띠었을 것"이며, 그들이 "이방 신들에게 바친 희생제물과 관련된 고기를 먹는 데 참여하는 것은 자신들이 악마적인 세력들과 상관없으며, 자신들이 진정으로 그 세력들에게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을 것"이라 말한다.[각주:22] 심지어 가드너는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들의 이러한 담력 있는 행동이 성령의 특별한 카리스마로서 일종의 "신령한 은사"에 해당한다고 보았을 것이라 지적한다.[각주:23] 이것은 니골라당 등의 방임적 영지주의 종파들의 극단적인 방탕함의 교리를 예견하게 만든다.[각주:24] 또 가드너는 추가적으로, 혹 고린도의 이런 자들이 자신들의 "신령한 은사"로 다른 교인들을 "세우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을 가능성도 열어둔다. (하지만 바울은 세우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응답한다.) 바울이 은사에 대해 고린도전서에서 비교적 길게 다루는 것은 이런 배경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이제 바울은 고린도 전서 8장 2절에서 보다 일반적인 "지식"과 "아는 것"에 대하여 다룬다. 여기서 고린도의 "신령한 자들"과 바울의 어떤 것을 안다고 확신하는 것에 대한 시각의 차이가 보인다. 헤링은 고린도 교인들이 명사형 γνῶσις(그노시스)를 사용하여 자신들의 지식의 "완전하거나 적어도 명확하게 정의된 '은사'"의 측면을 강조한다고 말한다. 반면에 바울은 점점 알아가는 과정을 가리키는 동사형을 더 선호한다.[각주:25]

 

 특히 고전 8:2에서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의 주장으로 현재완료 부정사인 ἐγνωκέναι(에그노케나이)를 사용한 반면, 자신의 주장으로는 부정과거인 ἔγνω(에그노)를 사용한 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인들은 현재완료를 통해 자신들이 "이미 알게 된 상태"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데 반해, 바울은 '동작의 시작'을 알려주는 부정과거를 통해 그들의 "앎"이 완전한 것이 아니며 이제 시작임을 알려주기 때문이다.[각주:26] 바울에게 있어서 고린도 교인들 중 일부가 "나는 확실히 안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바른 기독교적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단정적인 깨달음은 타인과 자신을 배타적으로 분리하고 교만한 폭력의 행사를 정당화할 수 있다. 바울의 종말론적인 시각은 이미 얻은 것으로 생각하는 자들에게 "아직 아니다"라는 경고의 역할을 수행한다.

 

  대개 바울의 이런 "분열"에 대한 비판을 받는 자들은 '모든 사람들이 참된 신자는 아니며, 자신들은 참으로 구원받은 무리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라고 주장할 것이다. (마치 구원파가 주장하는 것과 같이) 여기 고린도 교인들 역시 소위 그런 "참된 구원 받은 자들"이 존재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1장 19절에서 바울은 이런 자들이 자신들만의 소그룹을 이루어 "검증된 자들"(δόκιμοι; 도키모이)을 선별하는 행위에 대해 말한다. (개역한글에서는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라 번역되어 있다.) 그래서 이들은 성만찬에서 "하나 됨" 보다는 "시험을 통과한 자들"과 어울리길 원했다. 그들에게 파당은 불가피한 요소였다.[각주:27] 그래서 그들은 트리클리니움에서 자신들끼리 식사를 진행하고, 일반 신자들은 아트리움에서 푸대접을 받도록 하였다.

 

 

 

니골라당으로의 발전과 요한계시록


 일반적으로 "니골라 당"은 사도행전 6장 5절의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인 니골라의 이름을 딴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이 견해는 주로 초대 교부들에 의해 가장 먼저 등장하였다. 이레나이우스와 히폴리투스는 사도행전 6장 1-6절에 호소하면서 계시록의 "니골라 당"의 기원이 안디옥의 니골라에게 있다고 주장한다. 또 이레나이우스는 요한복음이 영지주의자인 케린투스와 니골라 당이 가르치는 오류에 대항하기 위해 기록되었다고 언급하기도 한다.[각주:28]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역시 니골라 당의 이단 운동을 안디옥의 니골라의 추종자들과 연관시킨다.[각주:29] 이 외에도 터툴리안, 에피파니우스 등의 교부들도 이에 대해 증언한다.

 

 그러나 "니골라 당"이 실제 안디옥의 니골라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지는 밝혀진 바가 없다. 데이비드 아우네는 이것을 "전설과 상상의 혼합"이라고 부른다.[각주:30] 「라이프성경사전」에서도 이것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없다고 말한다.[각주:31] 그레고리 비일 역시 안디옥의 니골라와 "니골라 당"을 연결 짓지 않으며, 헬라어 νικα λαόν(니카 라온)이 "그가 백성을 이기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과, 니골라 당이 계시록의 문맥에서 "발람"과 연관되어 있고, 랍비 문헌의 "발람"이 어원학적으로 "백성을 삼키는 자"라는 뜻이 있다는 것에 착안하여, "발람"을 헬라어로 표현한 것으로 여긴다.[각주:32] 물론 아우네는 이런 어원학적인 논의가 극도로 공론적이기 때문에 "니골라"가 안디옥의 니골라와 명확한 연관성이 없다 하더라도, 상징적인 이름이기보다는 실제 이름이라는 결론도 열어둬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각주:33]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니골라 당"이 "발람의 교훈"과 연관성이 있다는 것과, 영지주의 이단의 분파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의견이 일치한다.[각주:34] 계시록에서 "발람의 교훈"은 거짓 여선지자 "이세벨"과 관련하여 우상숭배의 제물을 먹고 우상의 성적인 축제에 참여하는 것이 허용될 수 있다는 방임주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도 요한의 시대에 로마 사회에서는 시민들의 경제 활동이나 사회적 활동 등이 우상숭배 행위와 밀접한 관련성이 있었다. 특히 상업 길드에 가입하여 시장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상인이라면, 각 조합이 섬기는 신들의 축제에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했다. 당시 모든 무역조합은 카이사르의 신성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축제들은 대개 성적인 행위를 동반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축제들에 참가하지 않는 것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불이익을 받을 수 있었다.[각주:35]

 

 이런 상황에서 버가모 교회와 두아디라 교회에서는 일종의 타협론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곧 우상의 축제에 참여하는 것은 애국심과 사회적 의무를 다 하는 것을 보여주는 예식일 뿐이며, 그리스도인들이 우상들을 진심으로 섬기는 마음으로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면 괜찮다는 것이다.[각주:36] 즉 발람이 이스라엘 민족들을 매춘으로 유혹해 우상숭배하게 한 것처럼, 그리고 이세벨이 아합 왕을 유혹해 우상숭배 하게 했던 것처럼 우상숭배를 향한 타협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가르침을 퍼트리는 거짓 교사들이 있었다. 이들은 실제로 자신들이 올바른 교리를 가르친다고 철석같이 믿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들이 등장하는 계시록의 본문에서, "행음"하는 것 외에 "우상의 제물"이 함께 언급된다는 것은 고린도 교회의 "신령한 자들"의 주장, 곧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우상의 제물을 마음껏 먹어도 좋다"라는 가르침을 상기시킨다. 특히 계시록 2장 24절에서 사도 요한이 두아디라 교회의 남은 자들, 곧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 대해 언급한 것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거짓 교사들이 가르쳤던 내용에서 유래된 표현인 것 같다. 아마 그것의 원래 형태는 "하나님의 깊은 것"이었을 것이다.[각주:37] 이들이 말하는 "깊은 것"이라는 용어는 이 거짓 교사들이 그노시스파, 곧 영지주의 교사들이었음을 암시한다.[각주:38]

 

 사도 요한의 시대에 이미 케린투스 등의 영지주의자들이 동시대인으로 활동하였던 것을 생각할 때, 고린도 교회의 "신령한 자들"의 존재로 예견되었던 영지주의의 실체가 2세기에 들어서면서 더욱 선명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고린도 교회에서 보였던 초기 영지주의 운동은 아직 윤곽이 뚜렷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당시의 "신령한 자들"은 우상숭배를 하기까지 개방적이진 않았을 것이며, 그럴 의도도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다만 자신들은 특별한 깨달음이 있으며, 이미 확실하게 하나님의 나라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들과 같은 신념을 가진 자들을 검증의 방식을 통해 찾아내어, 소그룹을 만들었으며, 자신들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는 일반 평신도들을 차별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모든 제약(율법적 제약 등)에서 해방되었기에, 자유롭게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담력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이것을 알고 행하는 것은 특별한 성령의 은사이며 능력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이런 생각이 발전하여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과 성적으로 부도덕한 행위를 해야 하는 축제에 참여하는 것이 가치중립적이라는 가르침에까지 이르렀다. 아마 그들이 보기에 우상의 축제에 참석하는 것을 꺼리는 많은 평신도들은 무식하고 미신을 믿는 "어린아이들"로 보였을 것이다. "어른"과 같이 성숙한 믿음을 가진 자신들은 이런 행동들을 주저 없이 하면서도 그런 악한 영향력에서 충분히 자유로울 수 있는 "강한 자들"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이들의 사랑 없는 지식, 곧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는 일반 기독교인들을 차별하는 교만함의 지식이 오히려 이들의 미숙함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그리고 바울의 예상은 적중한 것으로 보인다. 남들과 다르며 자신은 특별한 깨달음이 있다는 망상은 결국 이들을 극단으로 이끌기에 충분했다.

 

 필립 샤프는 니골라 당에 대해 다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에 의하면, 일곱 집사 중 한 명이었던 안디옥의 니골라는 성실한 남편이었고 자녀들을 무흠 하게 양육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특별한 가르침에 매료되었는데, 그것은 "우리는 육체와 싸우고 육체를 혹독하게 다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의 제자들은 이 말을 듣고 오해하여 "육체를 완전히 지배할 수 있으려면 모든 감각을 충분히 사용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했다고 한다.[각주:39]

 

 안디옥의 니골라와 니골라 당에 대한 이런 이야기가 확인 가능한가의 여부와는 별개로, 니골라의 육체를 학대해야 한다는 특이한 금욕적 가르침이 다른 극단인 방종의 교리로 변질된 것은 남들과는 다르게 더욱 특출 나고자 하는 신앙의 추구가 어떻게 왜곡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어떤 기독교인이 소위 "성경을 잘 가르치는 교회"를 찾기 위해 평범한 기독교를 배타적으로 거부하다가 이단에 빠지게 되는 과정도 이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결론


 고린도 교회의 "신령한 자들"과 버가모 교회 및 두아디라 교회에서 활동했던 "니골라 당"은 일반적인 기독교의 가르침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욱 특별한 것, 남들과는 다른 깨달음, 더 확실한 교리를 추구한 행위의 극단적 결말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말해준다. 특히 이들이 소유한 교리가 기존의 신자들과 자신들을 구별하여 교회에 분열과 논쟁을 촉발시키고, 자신들은 구원의 좋은 것, 하나님 나라의 왕적인 신분을 이미 완전하게 얻었다는 확신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은 대한예수교침례회 등의 구원파 교단의 모습을 가장 잘 묘사해 주는 듯하다.

 

 기존의 기독교와 관계를 단절하고 자신들만의 모임을 만들어 외부의 사람들을 검증한 뒤 자신들의 사상에 동의하는 자들만을 받아들이는 폐쇄성 역시 구원파의 대침과 매우 유사하다. 더욱이 대침에는 인간을 영, 혼, 육의 삼분법으로 구분하는 영지주의 속의 헬라 철학 사상도 함께 갖고 있으니 성경의 초기 영지주의 운동과 대침은 정말 상당한 공통점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상적 배경은 대침이 모든 "세상적인 것"이라 생각하는 물질적인 것들에 대해 일정 부분 금욕적인 성향을 보이는 것에 대한 좋은 이유를 제공해 준다.

 

 바울은 지식이 아니라 사랑이 세우는 것이라 말했다. 반면에 고린도의 "신령한 자들"은 자신들의 우월한 지식으로 무지한 기독교인들을 세우려고 하였다. 그러나 어떤 교리 체계의 전파보다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이런 지식에 대해 무지하다고 해도 기독교적 사랑을 보이는 것이다. 지식은 수단이며, 사랑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 지식을 위해 사랑을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

 

 그런데 대침은 단정적인 "이미 얻은 구원"의 자의적 확신이라는 교리를 수호하기 위해 기존의 모든 기독교 교회들과 결별하였다. 그리고 이 교리를 아는 것이 복음을 잘 가르치는 것이고, 구원을 참으로 깨달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때문에 대침 사람들은 자기들 보다 성경을 많이 읽거나 잘 아는 기독교인은 별로 없다고 교만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교리적 차별점이 이들에게는 우월의 요소가 되었다. 따라서 이들은 고린도 교회의 "신령한 자들"과 같이, 굳이 다른 교단들과 연합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참된 그리스도인은 아니기 때문에, 즉 "교회 다닌다고 해서 다 구원 받은 건 아니기 때문에" 참된 구원 받은 무리인 자기들끼리 뭉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런 성향은 대침을 탈출해서까지 계속 이어진다. 탈대침 한 사람들이 끊임없이 "좋은 교회", "잘 가르치는 교회"를 찾아 나서거나 혹은 교회에 아예 나가지 않은 채 자신만의 또 다른 특별한 교리 체계를 만드는 것을 보면 "남들과는 다르게 제대로 아는 나"를 위해서 얼마나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지 새삼 느껴진다. 그래서 인터넷 커뮤니티 같은 곳에서 이들은 서로의 교리를 향해 으르렁거리며 쉬지 않고 물어뜯기 바쁘다. 마치 대침이 정통 교단과 결별하고 자신들만의 새로운 모임을 만든 것과 같이, 또 고린도 교인들이 서로를 대적하여 당파를 만든 것과 같이, 이 분들도 동일한 방식으로 분쟁한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대침과 관련된 사람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한국 교회의 일반적인 신자들 역시 이런 특별하고도 우월한 길로 가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분들이 존재한다. 어떤 특정 교리, 특정 신학, 특정 가르침 등에 꽂혀서 말이다. 이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을 통해 자신과 타인을 구별하고 소위 "평범한 기독교인들"을 차별하며 자신을 특별한 자로 취급하기 시작한다면 나는 이것이 영지주의와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영지주의가 "지식"과만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만약 어떤 사람이 "교리적인 것은 모두 헛된 것이다. 성경만을 봐야 한다"라고 생각하면서 이런 자신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자들을 평가절하하면서 스스로는 "성령의 감화로 이런 결론에 다다른 것이다"라고 교만하게 으스댄다면, 나는 이것이 바로 영지주의의 정신이라고 말하고 싶다. "다른 평범한 기독교인들보다 더 나은 나"를 설정하게 만드는 그 모든 것들이 각자에게 "γνῶσις(그노시스)"가 될 수 있다. 

 

 바울은 "γνῶσις(그노시스)", 즉 "지식" 자체를 악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자. 이 "지식"이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행동하도록 만드는가가 관건이다. 바울은 "지식"을 통해 사랑을 실천하라고 우리를 초대한다. 제아무리 올바른 가르침이 있더라도, 이것이 기독교적 사랑을 보여주지 못하고 분열과 헛된 논쟁을 일으키기만 할 뿐이라면, 이것은 좋은 "γνῶσις(그노시스)"가 아닐 것이다. 대침이 영원한 속죄로 인한 구원의 자의적 확신의 교리에 몰입하여 일반적인 기독교 세계와 단절한 것을 보고 우리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보자. 우리는 다른 기독교인들에게 배타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지, 그래서 그들을 "보통 기독교인들"이라며 폄하하고 있는지, 아니면 사랑의 친절함을 보이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함께 교제하고 있는지 말이다.

 

 


 

 

 

<이단 생활!>

 

이단 생활! -프롤로그- (기독교 이단 웹툰)

기독교 이단 경험을 바탕으로 만든 일상(?) 웹툰입니다. 이단 생활! -1화- (기독교 이단 웹툰) littlebiblicaltheology.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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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에 대해서는 내가 이전에 쓴 글을 참고하라: https://littlebiblicaltheology.tistory.com/entry/%EC%98%81%EC%9B%90%ED%95%9C-%EC%86%8D%EC%A3%84%EC%97%90-%EB%8C%80%ED%95%9C-%EB%8C%80%ED%95%9C%EC%98%88%EC%88%98%EA%B5%90%EC%B9%A8%EB%A1%80%ED%9A%8C%EC%83%9D%EB%AA%85%EC%9D%98%EB%A7%90%EC%94%80%EC%84%A0%EA%B5%90%ED%9A%8C%EC%9D%98-%ED%95%B4%EC%84%9D%EC%9D%98-%EB%AC%B8%EC%A0%9C%EC%A0%90-feat-%EA%B5%AC%EC%9B%90%ED%8C%8C [본문으로]
  2. https://littlebiblicaltheology.tistory.com/entry/%EB%8C%80%EC%B9%A8%EC%9D%84-%ED%83%88%EC%B6%9C%ED%95%9C-%EB%B6%84%EB%93%A4%EC%9D%B4-%EC%A3%BC%EC%9D%98%ED%95%B4%EC%95%BC-%ED%95%A0-%EC%9C%A0%ED%98%95%EB%93%A4 [본문으로]
  3. Williston Walker, A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trans. In Seol Song, Christian Digest Press, 2016, p. 75. [본문으로]
  4. Craig S. Keener, The Gospel of John: A Commentary I, trans. Ok Yong Lee, Christian Literature Center, 2018, p. 468. [본문으로]
  5. Ibid., p. 469. [본문으로]
  6. Philip Shaff,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2, trans. Gil Sang Lee, Christian Digest Press, 2016, p. 420. [본문으로]
  7. Ibid., p.421. [본문으로]
  8. 「성경문화배경사전」의 p. 767. [본문으로]
  9. Philip Shaff, op. cit., p. 431.
    [본문으로]
  10. Ibid. [본문으로]
  11. Ibid. [본문으로]
  12. 「성경문화배경사전」의 p. 768. [본문으로]
  13. Philip Shaff, op. cit., p. 432. [본문으로]
  14. Irenaeus, Against Heresis, 1:8:1 & 8:3. [본문으로]
  15. Anthony C. Thiselton,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trans. Ji Cheol Sin, Holy Wave Plus, 2022, p. 481. [본문으로]
  16. Ibid., p. 483. [본문으로]
  17. Ibid. [본문으로]
  18. Ibid. [본문으로]
  19. Ibid., p. 632. [본문으로]
  20. Ibid., p. 634. [본문으로]
  21. Ibid., p. 2002. [본문으로]
  22. Ibid., p. 1069. [본문으로]
  23. Ibid. [본문으로]
  24. 위의 "영지주의 운동의 주요 특성"을 보라. [본문으로]
  25. Anthony C. Thiselton, op. cit., p. 1073. [본문으로]
  26. Ibid. [본문으로]
  27. Ibid., p. 1486. [본문으로]
  28. David E. Aune,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52A Revelation 1-5, trans. Cheol Kim, Solomon Press, 2003, p. 547. [본문으로]
  29. Ibid. [본문으로]
  30. Ibid., p. 546. [본문으로]
  31.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2391230&cid=50762&categoryId=51387 [본문으로]
  32. G. K. Beale, The Book of Revelation: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The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trans. Gwang Man O, Holy Wave Plus, 2016, p. 427. [본문으로]
  33. David E. Aune, op. cit., p. 548. [본문으로]
  34. Ibid., p. 546. [본문으로]
  35. G. K. Beale, op. cit., p. 423. [본문으로]
  36. Ibid., p. 424. [본문으로]
  37. Ibid., p. 449. [본문으로]
  38. David E. Aune, op. cit., p. 643. [본문으로]
  39. Philip Shaff, op. cit., p. 437-43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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