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다의 딸은 죽었는가? 깨사모의 질의응답을 보고... (사사기 11장 30-4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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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다의 딸은 죽었는가? 깨사모의 질의응답을 보고... (사사기 11장 30-40절)

바잇 카탄 2024. 7. 9. 13:30

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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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사모 질의응답 게시판을 둘러보다가 재미있는 질문과 답변이 있어서 이에 대해 글을 써보기로 했다. 그 질문은 입다의 딸이 정말로 번제로 바쳐져 죽은 것인가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질문자는 히브리어 원어를 가져오며, 그곳에는 죽음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고 의문을 표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한예수교침례회(생명의말씀선교회, 이하 대침) 상담인의 답변은 별로 만족스럽지 못하다. 대침 상담인은 질문자가 의문을 갖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 특히 히브리어 원어에 대해서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서원이 무슨 의미인가, 그리고 입다가 서원까지 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를 통해 입다의 딸이 정말로 인신제사로 바쳐졌다고 주장한다.

 

솔직히 이런 대답은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서원의 의미를 통해서는 입다의 딸이 필연적으로 죽어야만 했는가에 대해 확실한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이에 대해서 찾아보았다.

 

 

 


 

 

 

일반적으로 한국의 전통적인 해석은 입다의 딸이 여기서 실제로 인신제사를 위해 바쳐졌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개역한글 번역에서 입다의 딸을 번제로 바칠 것을 서원하고 또 입다의 딸이 죽임을 당했다는 식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삿 11:31)
“아비에게 또 이르되 이 일만 내게 허락하사 나를 두 달만 용납하소서 내가 나의 동무들과 함께 산에 올라가서 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 하겠나이다 이르되 가라하고 두달 위한하고 보내니 그가 그 동무들과 함께 가서 산 위에서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고 두달만에 그 아비에게로 돌아온지라 아비가 그 서원한대로 딸에게 행하니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하고 죽으니라 이로부터 이스라엘 가운데 규례가 되어” (삿 11:37–39)

 

이렇게 명백한데 뭐가 문제라는 것일까? 문제는 히브리어 원어에 있다. 히브리어 원어는 이에 대해 다소 모호하고도 다르게 말한다. 먼저 입다가 하나님께 서원하는 장면에 대해서 히브리어 원어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וְהָיָ֣ה הַיּוֹצֵ֗א אֲשֶׁ֨ר יֵצֵ֜א מִדַּלְתֵ֤י בֵיתִי֙ לִקְרָאתִ֔י בְּשׁוּבִ֥י בְשָׁל֖וֹם מִבְּנֵ֣י עַמּ֑וֹן וְהָיָה֙ לַֽיהוָ֔ה וְהַעֲלִיתִ֖הוּ עוֹלָֽה׃ פ”

 

이 중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의 부분이 문제다. 이 본문은 히브리어로 베 하야 라아도나이 베하알리티후 올라”(וְהָיָה֙ לַֽיהוָ֔ה וְהַעֲלִיתִ֖הוּ עוֹלָֽה)로 되어 있다. 관건은 접속사 바브, (וְ)”를 어떻게 번역하냐이다. 접속사 바브그리고, 그러나, 또는등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것의 의미는 문맥이 결정한다.

 

이것을 그리고(and)”의 의미로 번역하면 개역한글의 번역과 동일한 것이 된다. 개역한글에서는 따라서 그를 여호와께 바치겠다 그리고 번제로 드리겠다로 이것을 해석했다.

 

반면에 이것을 또는(or)”이라고 번역하면 그 의미가 달라진다. “또는이라고 번역할 경우 이 본문을 직역했을 때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 “그가 여호와께 있을 것입니다. 또는 내가 그것을 번제로 바치겠습니다.”

 

즉 이 경우에는 입다가 두 가지의 경우를 염두해두고 서원을 한 셈이 된다. 만약 입다의 집에서 인간이 먼저 나온다면, 그는 그 인간을 여호와의 소유로 돌릴 것이다. 만약 입다의 집에서 짐승이 먼저 나온다면, 그 짐승은 번제로 바칠 것이다. 이렇게 번역하면 입다의 딸은 사실 번제로 바쳐지지 않았을 수 있다.

 

혹자는 그렇다면 사사기 11:37-39에서 입다의 딸이 죽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을 수도 있다. 여기서도 히브리어 원어가 문제다.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죽음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즉 해당 본문의 번역은 개역한글 번역자가 의도적으로 본문에는 없는 단어를 추가하여 번역한 것이다.

 

사사기 11:37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는 히브리어로 베에브케 알-베툴라이 아노키”(וְאֶבְכֶּה֙ עַל־בְּתוּלַ֔י אָנֹכִ֖י)이다. 이것을 직역하자면 내가 나의 처녀성에 대해 울 것입니다.”를 뜻한다.

 

사사기 11:38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고역시 바테브크 알-베툴레하”(וַתֵּ֥בְךְּ עַל־בְּתוּלֶ֖יהָ)이며, 직역하자면 그녀의 처녀성에 대하여 울었다.”이다.

 

마찬가지로 사사기 11:39딸이 남자를 알지 못하고 죽으니라에는 죽음이라는 단어가 없으며 히브리어에서 베히 로-야드아 이쉬”(וְהִיא֙ לֹא־יָדְעָ֣ה אִ֔ישׁ), 그녀가 남자를 알지 못했다.”로 되어 있을 뿐이다.

 

입다의 딸

 

 

 

 


 

 

 

 

 

그렇다면 학자들의 견해는 어떨까? 학자들은 이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양하게 양분되어 있는 것 같다.

 

E. W. 불링거(E. W. Bullinger)는 저명한 히브리어 문법학자이자 해설자인 랍비 킴히(David Kimchi)를 따라 접속사 바브“or”의 의미로 보고 입다의 딸이 인신제사로 바쳐진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 헌신적인 삶을 위해 바쳐진 것, 곧 평생 결혼하지 못한 채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사는 것을 뜻한다고 말한다.[각주:1]

 

랍비 조나단 마고넷(Jonathan Magonet) 교수 역시 접속사 바브“or”로 여기면서 입다의 서원이 두 가지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여인들이 입다의 딸을 위해 애곡했던 것은 그녀의 죽음 때문이 아니었다. 마고넷 교수는 입다의 딸이 죽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추가적인 이유로 여인들이 매년 그녀를 위해애곡하는 의식을 했다는 것의 히브리어 전치사 (לְ)”에 집중한다. 왜냐하면 이 전치사는 “to”의 의미를 일반적으로 갖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인들은 해마다 실제로 입다의 딸의 앞에 가서 나흘씩 애곡한 것이다. 또한 입다의 딸이 죽지 않았고 다만 처녀성에 대해서 여인들이 슬퍼했다는 점은 고대의 극단적인 처녀성에 대한 강조의 배경을 잘 보여준다.[각주:2]

 

모쉐 라이스(Moshe Reiss)는 사사기의 본문이 입다가 자신의 딸을 번제로 드렸다는 것을 지지하지 않으며, 다만 그녀가 처녀로 일생을 살도록 만들었음을 암시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그는 유대-기독교의 주석가들이 10세기 까지는 이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말한다.[각주:3] 이에 대해서 로버트 부스(Robert Booth) 역시 동일한 의견이다. 그는 입다의 딸이 인신제사로 바쳐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막에서 봉사하는 임무를 위해 바쳐졌다고 결론 내린다.[각주:4]

 

 

 


 

 

 

 

반면에 해당 본문에서 아케다 사건과 같은 함의를 이끌어내려고 하는 학자들은 전통적인 해석, 곧 입다의 딸이 실제로 인신제사로 바쳐졌다는 해석에 머무는 것을 선호한다.

 

트렌트 C. 버틀러(Trent C. Butler)는 입다가 실제로 자신의 딸을 인신제사로 바쳤다고 생각하는듯 싶다.[각주:5] 그러나 사실상 그는 문학 비평적인 면에만 관심이 있으며 입다가 인신제사를 바쳤다는 가설의 실제성에 대해 검토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뢰머(T. Römer)는 사사기 11:30-40에서 아케다 사건의 함의와 함께 헬레니즘적인 영향을 받은 것을 발견한다. 따라서 그는 이 본문이 페르시아 제국 말이나 헬레니즘 시기 초에 편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 점에서 입다의 딸의 인신제사가 다른 신화들의 인신제사에서 평행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각주:6]

 

제임스 P. 브레킨리지(James P. Breckinridge)는 이스라엘의 배교, 인간의 죄성, 하나님의 은혜의 교훈을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입다의 딸이 실제로 인신제사로 바쳐졌다는 입장을 유지하길 원한다. 그는 델리취(Delitzsch) 등의 신학자들을 검토한 뒤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이와 같이 주장한다.[각주:7] 그러나 그는 성경 원어에 대한 논의는 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번제서원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 고찰할 뿐이다.

 

나는 데미안 스타체라(Damian Stachera)라는 어느 신학생의 논문에서도 번제의 의미에 집중하여 입다의 딸이 인신제사로 바쳐졌다는 것을 지지하는 내용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히브리어 올라(עוֹלָֽה)”에 대해서는 연구를 진행하였지만, 히브리어 문맥에 대한 부분은 검토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입다의 이야기의 극적인 효과와 전통적인 가치관을 유지해야 한다는 점에 호소할 뿐이다.[각주:8]

 

 


 

 

이에 대해서는 한국의 학자들의 견해도 존재한다.

 

김경래 박사는 해석상 입다의 딸이 과연 번제물이 되어 죽었는지에 대해 밝히는 것은 어렵다고 하면서, 반면에 히브리어 본문에 명백히 죽는다라는 단어가 없으므로 이것을 번역문에 삽입한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한다.[각주:9]

 

팟캐스트 성서비블리아로 유명한 이익상 목사는 바브“or”의 의미로 보며, 히브리어 본문에 죽는다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입다가 자신의 딸을 번제물로 바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 역시 개역한글의 번역이 히브리어 본문과 큰 차이가 있음을 지적한다.[각주:10]

 

 

 

 

 


 

 

 

 

 

결론적으로, 필자가 생각하기에 히브리어 본문에 충실한 해석은 입다의 딸이 죽지 않았을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다. 히브리어 본문은 입다의 딸이 죽었다라고 말하지 않으며, 히브리어 접속사 바브의 여러 번역 가능성을 생각해볼 때, 그리고 성경에서 인신제사를 혐오하며 금지하는 것으로 생각해볼 때 입다의 딸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위해 바쳐졌다는 가설을 긍정적으로 검토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입다의 딸이 명백하게 번제로 바쳐졌다고 주장하는 견해들은 히브리어 본문에 의거한다기 보다는 문학적 장치로서, 아니면 본문 비평학적인 이유에서, 아니면 교훈적이거나 신학적인 함의를 위해서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한국 교회가 입다의 딸이 죽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개역한글의 번역이 중립적이지 않고 죽었다라는 본문에는 없는 단어가 추가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는 고대 근동에서 여성의 처녀성이 매우 중요했던 시기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서 그런 것일 수 있다. 그래서 여인들이 입다의 딸이 죽지 않았는데도 그녀를 위해 애곡한다는 것이 현대인들에게는 잘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입다의 딸이 죽었다라고 말하는 전통적인 견해(요세푸스나 루터와 같은)는 이런 생각을 더욱 부채질한다.

 

그러나 히브리어 본문과 하나님의 성품을 전반적으로 고려해볼 때, 우리는 입다의 딸이 인신제사로 바쳐진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섬기는 삶을 위해 처녀로 일평생 살도록 바쳐진 것이라는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 할 것이다.

(사실 필자는 입다의 딸이 죽지 않았다는 견해가 더욱 설득력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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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E. W. Bullinger : Great cloud of witnesses in Hebrews 11, Kregel Publications, 1979, 324-331. 해당 내용은 다음에서 확인 가능하다: https://www.jba.gr/Korean/%EC%9E%85%EB%8B%A4%EB%8A%94-%EC%A0%95%EB%A7%90-%EC%9E%90%EC%8B%A0%EC%9D%98-%EB%94%B8%EC%9D%84-%EB%B2%88%EC%A0%9C%EB%AC%BC%EB%A1%9C-%EB%93%9C%EB%A0%B8%EB%8A%94%EA%B0%80.htm [본문으로]
  2. https://www.thetorah.com/article/did-jephthah-actually-kill-his-daughter [본문으로]
  3. Moshe Reiss, The Sacrifice of Jephthah's Daughter: Jewish and Christian Perspectives, Louvain Studies vol. 36(4), 2012, 231-336. https://poj.peeters-leuven.be/content.php?id=3019239&url=article [본문으로]
  4. Robert Booth, DID JEPHTHAH KILL HIS DAUGHTER?: AN EXAMINATION OF JUDGES 11:29-40, Historical & Poetical Books, 2008, 13. [본문으로]
  5. Trent C. Butler,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8 Judges, trans. Ho Jin Jo, Solomon Press, 2011, 700. [본문으로]
  6. T. Römer. Why Would the Deuteronomists Tell about the Sacrifice of Jephtah’s Daughter?. Journal for the Study of the Old Testament, 1998, 77, pp.27-38. [본문으로]
  7. James P. Breckinridge, JEPHTHAH’S SACRIFICE: NATURE AND SIGNIFICANCE FOR TODAY, TORCH TRINITY JOURNAL 6 (2003), 129-130. [본문으로]
  8. Damian Stachera, Issues in the interpretation of the narrative about Jephthah and his daughter, The Editing and Formation of the Book of Judges, 2019, 12. [본문으로]
  9. https://news.koreadaily.com/2002/07/01/life/leisure/181817.html [본문으로]
  10. https://bibliakorea.com/%EB%88%84%EA%B5%AC%EB%82%98%EC%9D%BD%EB%8A%94%EC%84%B1%EC%84%9C%EA%B0%9C%EB%A1%A0?mode=show&pid=1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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