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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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에 대해서는 아래의 글을 참고하라.
십일조에 대해서는 아래의 글을 참고하라.
포도나무는 아래의 글을 보라.
A이단이 말하는 구원 받은 이후의 삶이란 대부분은 윤리적인 측면에 집중하기 보다는 교회 생활 및 관습과 관련된 것에 집중하기 마련이다. 혹 윤리적인 측면이 있더라도 교회 내의 생활과 관련한 윤리에 집중한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세상과 구별되고 교회 안에서 잘 생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세상과 구별됨"을 이들은 신약성경에서 사용된 당시의 헬라어 용례에 맞게 해석하지는 않는다. 특히 그들은 사도 요한의 문서들에서 사용된 "세상"의 의미에 대해서는 무지한 것 같다. 사도 요한 문헌들의 "코스모스(세상)"의 의미에 대해서는 아래의 글을 참고하라.
이들에게 "세상"은 보다 중세 로마 가톨릭의 사상과 비슷하다. 즉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세속적"이라 보이는 것들로부터 자신들을 구별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가 A이단에 다닐 때에는 "세상적"이라는 낙인이 찍힌 것들은 행하거나 즐겨서는 안 됬다. 그런 것들에는 세상 노래(가요), 세상 영화, 세상 사람들이 입는 반바지, 염색, 귀걸이, 술, 담배, 티비 프로그램, 게임, 문화 생활 등이 포함되었다. 그래서 이들은 마치 중세 가톨릭 수사들이 수도원에서 생활하듯,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것과 세상과 구별되는 것을 거의 동격으로 취급한 듯하다.
필자가 다닐 시기에는 심지어 휴가 기간, 여가 시간 등에 이런 것들을 즐기는 것이 그리스도인 답지 않은 것으로 정죄 받곤 했다. A이단에게 그리스도인이란 모든 시간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에게 모든 시간을 "교회와 관련된 일"에 사용하는 것을 뜻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교제 시간에 자조적인 간증을 하면서, 자신이 교회 교제에 소홀히 했더니 세상 노래, 세상 영화를 보게 되더라, 그래서 자신이 죄를 짓게 되었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했다.
세상과 구별되고 세상적인 것들을 피하기 위해서 교제에 잘 나와야 한다는 설교들이 강단에서 선포되었다. 남는 시간이 생기면 "딴 생각"을 하게 되고 그것이 세상적인 것을 즐김으로써 죄를 짓게 되는 기회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는 시간에는 보다 유익하게 시간을 보내기 위해 교제에 나오는 것이 권장된다.
A이단에는 "생활 말씀"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이것은 구원을 받는 것과 관련된 설교가 아닌, 생활에 관련된 설교를 뜻한다. 그리고 이런 "생활 말씀"은 거의 대부분이 교회 생활 위주이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진정한 신앙생활이란 교회에서 교제에 참석하고 봉사하고 전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들은 종교 생활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제시한다. 그러면서도 설교에서 타 교단이 너무 종교적이라며 비판한다. 정말 아이러니한 부분이다.
설교에서 타 교단을 비판할 때의 레파토리는 헌금에 대한 부분도 있다. 어떤 목사는 장로교에 자기가 갔더니 헌금 바구니를 돌리더라, 그러면서 자신들은 그렇게 헌금을 강조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A이단의 어떤 목사는 십일조를 구원과 연결지어 "십일조는 구원 받은 사람의 의무이다."라고 주장할 뿐 아니라 "십일조를 내지 않는 사람이 참으로 구원 받은 사람인지 모르겠다."라고까지 주장한다.
수양회 기간이나 전도집회 기간의 끝에는 뒤에 헌금함이 놓여 있다며 헌금을 해달라는 설교를 직접적으로 하기도 한다. 특히 큰 건축 등을 앞두고 있거나 진행 중일 때는 이러한 요청이 더욱 심해지고 빈번해진다.
이런 것을 지적하면 이들은 자신들이 설교에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라고 말한다고 변명한다. 그러나 십일조를 구원 받은 사람의 "의무"로 제시하는 것은 자원하는 것과 모순된다. 이 때문인지 큰 돈을 "작정 헌금" 해야 하는 시즌이 오면 신도들은 으레 그렇듯이 대출을 통해 빚을 내서 헌금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A이단은 이런 실태들에 대해서 거의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런 신도들의 잘못된 선택과 어려움들에 대해 도와줄 생각조차 없는 듯이 보인다. 그들은 "개인은 가난해도 교회는 부유해야 한다"라고 설교하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신앙생활"에 대해 배운 사람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까? 이 사람은 예수님이 강조한 이웃 사랑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런 고민을 하지 않는다. 혹은 타인을 대할 때에 윤리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에 대해서도 그리 많은 관심이 없다. 반면에 전도를 통해 A이단의 교세를 확장시키는 것에는 관심이 많다. 그리고 온갖 세상적인 것으로 보이는 세상 문화를 배격하는 것에는 관심이 많다. 그리고 교제에 참석하고, 교회 봉사를 하고, 십일조를 내고 작정 헌금을 하는 것에는 관심이 아주 많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이들의 이런 모습을 보면 어떻게 반응할까? 복음을 위해 정말 잘 하고 있다고 반응할까? A이단의 모습은 초기 기독교가 보여주었던 식탁 교제, 곧 "코이노니아"의 모습과 큰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코이노니아"에 대해서는 아래의 글을 참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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