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몇 주 전에 '거룩과 사랑이 충돌한다면?'이라는 제 견해를 묻는 질문에 제가 답한 글입니다. 글을 올리게 된 이유는 혹시 다른 분들께도 유익이 되지 않을까 하여 게시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문제 될 시에는 자삭하겠습니다. 저와 메일로 교제를 주고받았던 형제님께 평안이 있기를 바랍니다. 제게는 큰 도움과 유익이 되었습니다.^^
원본 첨부파일도 올립니다. 글이 길기 때문에 눈 아프신 분들은 출력해서 보시는 것이 좋습니다.
<거룩과 사랑이 충돌한다면?에 대하여>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성경과 작은 신학”을 운영하는 블로거 형제입니다.
링크 달아주신 글에 대해서는 모두 잘 읽었습니다. 특히 거룩과 사랑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상당 시간 동안 사색을 하신 흔적이 많이 보이는 글이네요. 또한 일반적인 한국의 성도 분들과는 다르게 여러 기독교 관련 서적이나 교리적인 부분에 대해서도 지대한 관심을 갖고 계시는 것 같아서 읽는 시간 동안 매우 즐겁게 느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미리 감사를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글들이나 묵상들은 하나님에 관한 주제를 다루는 만큼 읽는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할 뿐 아니라 이에 대해 서로 교제를 나누면서 하나님의 무한하신 속성들과 탁월하심을 칭송하게 만들기 때문에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런 종류의 글들에 대해 읽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제 스스로가 매우 좋아하고 제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들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글을 쓰기에 앞서 먼저 밝혀야 할 것이, 저는 말씀하신 범주의 거룩과 사랑의 관점에 대해서는 조금 다른 견해를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이와 같은 글을 쓸 때에는 상당히 조심스러워집니다. 왜냐하면 인터넷의 공간의 특성상 성도님께서 쓰신 글이 성도님의 견해를 백 퍼센트 담아내기는 어렵고, 저 또한 이 글을 통해서 그렇게 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 경험상 댓글이나 포스팅이나 무엇이 되었건 사람의 생각은 쉽게 바뀌거나 타인의 생각에 쉽게 동조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보고 싶은 것을 주로 보고, 믿고 싶은 것을 주로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저 또한 예외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모든 공간적인 제약과 인간의 본성적 나약함으로 인한 어려움 등을 감안하면서 제 견해를 말씀드려보겠습니다.
c.f. 말씀해주신 주제는 매우 간단하지 않은 주제입니다. 따라서 글이 매우 긴 점 양해 부탁 드립니다.
1. 하나님의 거룩과 사랑이라는 속성에 대하여
먼저 글을 읽어보니 성도님께서는 이미 하나님의 거룩과 사랑이라는 두 속성이 서로 충돌하거나 서로를 배제하거나 서로와 모순되도록 작용하지 않고 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고 계신 듯합니다.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이에 대해 논하는 것이 쓸데없는 시간 낭비로 여겨지실 수 있지만, 모쪼록 감히 몇 자 써보겠습니다.
하나님의 거룩은 히브리어로 “카다쉬” 혹은 “카도쉬”라고 읽을 수 있는 어근을 포함하는 단어로 쓰입니다. 이 어근은 “카드”라는 또 다른 어근에서 파생한 것인데, “자르다”라는 의미와, 이것에서 확장된 “분리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구약에서 처음 “거룩”이라는 단어가 쓰일 때에는 이 거룩의 의미가 “구별하다, 성별되다,” 혹은 “차원이 다르다”라는 의미로 쓰인 것입니다. 이후에 이 의미는 “의로움”이라는 하나님의 속성과의 밀접한 관련성 때문에 “순결하다”라는 의미로까지 확대되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거룩에 대하여 오토(Otto)는 그의 책 ‘거룩함의 개념’에서 이 거룩함의 개념은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본질을 이루는 것인 동시에 ‘절대적 접근 불가능성’, ‘절대적 압도성’, 혹은 ‘두려운 위엄’과 같은 개념을 포함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개념은 물론 윤리적인 측면으로도 거룩함을 뜻할 수 있기 때문에 윤리적인 “분리”, “성별”을 나타낼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구약의 제사장들이나 지도자들에게 스스로를 “구별”하라고 하셨을 때에도 이러한 개념을 염두하고 쓴 것입니다. 바빙크(H. Bavinck)는 ‘개혁교의학 제2권’에서 이 거룩이 하나님의 “소유”의 개념,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본질의 거룩과 일치하도록 어떤 것을 구별하시는 행위를 가장 많이 언급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게르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는 그의 ‘개혁교의학’ 1권에서 이 거룩이라는 개념은 반드시 하나님의 의지적인 작용과 연관 지어 생각해야만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탁월함과 완전성 그리고 자족하심과 전지전능 등의 아름다움에 대해 분명하게 알고 계시는데, 이것을 최고 선으로 기뻐하시는 것, 그래서 그 기뻐하시는 자기 자신의 최고 선을 지향하시고 선택하시고 보존하시는 그 의지 작용이 바로 거룩함의 개념에 대한 바른 이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무언가가 거룩하다고 하실 때에는 자기 자신의 최고선의 기준에 맞추어 그 외의 다른 것들이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고, 그렇게 해야 한다고 본인이 기쁘신 뜻으로 친히 선택하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논의는 우리 인간들과 쉽게 공유하는 속성인 만큼 공감하기도 쉽고 이해하기도 쉽기 때문에 긴 설명이 필요하진 않습니다. 그것은 조나단 에드워즈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어떤 대상에 대해 강력하게 마음이 이끌리시어 “선호”하시는 성향 혹은 그 의지의 작용을 뜻하는 것입니다. 보스는 이것을 좀 더 세밀하게 관찰하였는데, 특히 거룩이라는 개념과의 차이에 대하여 거룩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최고 선으로서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라 하였고, 반면 사랑은 “하나님 밖에 있는 것들에 대한 그분의 즐거움의 성향 또는 세 신적 위격의 서로를 향한 호의의 경향”이라 보았습니다. 하지만 보스의 이러한 견해는 조금 미흡한 점이 있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친히 스스로의 존재 전체를 향한 사랑도 분명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 안에서 거룩과 사랑의 관계에 대하여
보스는 특히 사랑을 하나님의 중심 속성으로 놓고 그 외의 나머지 속성들을 분류하려는 움직임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하면서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은 (동일하게) 하나님의 본성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 안에서 어떤 속성이 우위에 있다거나 혹은 어떤 속성이 절대적으로 다른 것을 기준으로 있게 된다는 점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혼합체가 아니며 단순하신(simple)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에 대해 바빙크 역시 동의하면서 “하나님 안에는 더 높거나 낮거나, 더 적거나 많은 속성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언급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바빙크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매우 확실히 신적 본질과 동일하다. 사랑은 하나님 자신처럼 독립적이고, 영원하며, 변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 안에 자신의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피조물들을 거쳐 다시금 하나님에게 돌아간다.” 또한, “진실로 하나님은 사랑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다(요일 4:8).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의 토대, 근원, 모범이다.(요일 4:10)” 조나단 에드워즈 역시 ‘참된 미덕’과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목적’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사랑하시며, 자기 자신이 사랑이시며, 그 사랑하심으로 인해 자신의 존재를 기뻐하시며, 그 기뻐하심으로 인해 천지가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로 보건대,저는 개인적으로 거룩의 개념이 사랑이라는 개념의 현현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룩이란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의지의 작용, 즉 자신의 탁월함을 선택하시고 그것을 기뻐하신다는 작용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에 대한 즐거움과 기쁨의 감정은 곧 자기 자신을 향한 일차적인 사랑에 있으며, 그 감정은 분명히 사랑 외에는 설명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이라는 전체와 위계상, 그리고 본질상 다른 차원에 있으시고(공간적 의미가 아니라 논리적 의미에서) 우리가 범접할 수 없는 높은 곳에 고고히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을 나타내는 여러 말들이 있으며(전지, 전능, 불가지성, 단순성, 단일성, 유일성, 완전성, 자족성, 편재성, 영원성 등등) 이 탁월함들을 본인 스스로 선택하시고 성별 하시며 기뻐하시는 것이 “거룩”이라는 개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무언가가 있으시다는 것을 묶어서 “거룩”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계시하신 사실 외에는 이 거룩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사실상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고유의 영역인 데다가,하나님께서 계시하시지 않으면 인간으로서는 절대 알 수 없는 불가지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는 “거룩”이라는 개념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설명하신 것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거룩이라는 개념은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보시기에 스스로를 설명하신 것, 즉 하나님께서 스스로가 거룩하다고 인식하신 것을 뜻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자기 사랑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 스스로가 거룩이라는 탁월함에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 스스로가 자신의 속성들을 지향하시고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신다는 뜻, 즉 사랑하신다는 뜻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거룩과 사랑은 성도님께서 알고 인정하신 것처럼 하나님 안에서 완전한 조화의 상태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자신의 그러한 속성들을 거룩하다고 인식하셨고, 하나님께서 실제로 사랑받으실 만하기 때문에 실제로 거룩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이유로 자신과 닮은 것을 필연적으로 거룩하다고 선언하시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 역시,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자신과 닮은 것이 되라는 명령입니다. 루이스 벌코프(Louis Berkhof)는 이러한 거룩과 사랑의 조화를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 완전히 결여된 어떤 대상에 대해서도 완전한 만족을 찾을 수 없다. 하나님은 그 자신을 인하여 자기의 이성적인 피조물을 사랑하시는데, 그것을 달리 표현한다면, 하나님은 그들 속에서 자신과 자신의 덕과 일, 재능들을 사랑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 안에서 거룩과 사랑은 사실상 동일합니다.
3. 복음과 관련한 거룩과 사랑에 대하여
이제 성도님의 글과 관련한 제 견해를 말씀드리겠습니다.저는 사실 우리의 구원의 서정과 관련하여 혹은 구속사적인 관점에서도 사랑이 먼저냐 거룩이 먼저냐의 차이는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고 조심스럽게 생각하는 편입니다. 일단 제가 위에서 여러 저명한 신학자들의 오랜 사색과 연구에서 나온 결론들을 통해 말씀드린 대로, 거룩과 사랑은 사실상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에, 우리 인간에게 공의를 요구하신다는 것도 사랑이라는 기반 위에 서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시고 자기를 최고 선으로 두시고 따라서 자기에게서 나온 계명들을 사랑하시고 이것을 완전히 충족하는 하나님과 닮은 대상을 사랑하신다는 논리적 전제가 있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에 예수 그리스도의 성자의 위격을 보내시도록 작정하신 것 또한 이 사랑과 거룩의 동일함에 있습니다. 물론 인간의 죄가 매우 악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보다 옳아 보이는 것은 하나님께서 본인을 사랑하셔서 자기 자신으로만 만족하실 수 있기 때문에, 달리 말하면 그 너무나 거룩하신 속성을 충족할만한 대상이 자기 자신 밖에 없기 때문에 성자의 위격을 보내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실 때에 일차적으로 거룩함이라는 속성에 반하여 인간을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편 57:2와 이사야 43:25, 그리고 42:8, 에스겔 20장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먼저는 자신을 위하여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인간은 구원의 주된 목표가 아니라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부차적인 목표이고, 구원의 주된 목표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기 자신, 즉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이 먼저라면 사랑하는 사람을 지옥에 보내시는 하나님이 이해가 되는가?”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다뤄야 할까요? 이것에 대해서는 폴 워셔라는 조금 과격하지만 선교에 매진하시는 목사님께서 좋은 예시를 들어준 것이 있습니다. 갓난아기를 사랑스럽다 여기며 사랑하는 사람들은 낙태를 혐오하며 미워합니다. 마찬가지로 거룩과 사랑은 하나이기 때문에, 거룩한 것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렇지 않은 것은 반드시 미워하셔야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지옥에 던지시는 주된 이유는 사랑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사랑받을 만한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자신의 정욕과 죄를 위해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을 사실상 모독하는 데에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아까 설명드린 대로 일차적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십니다. 따라서 자신의 형상을 모욕하는 방식으로 사용하는 대상에 대하여는 반드시 미워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지옥에 가야 하는 주된 이유 중 하나입니다.
따라서 말씀하신 내용 중 “사람들이 본인들이 하나님께 사랑받고 있는 줄 착각한다”는 취지의 글에 대해서는 저도 동감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신자뿐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도 인정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왜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 아닙니까? 그분의 보혈과 그분의 전가 때문 아닙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과연 무엇을 보고 그리스도인들을 사랑하신다 하시겠습니까? 우리 자신입니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입니까? 당연히 고민할 필요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자기애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으나 구원받지 못한 사탄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다.”라고 쓰신 부분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말씀드리자면 저와는 다른 의견이십니다.^^; 거듭나지 못한 자들이나, 거듭난 자들이나 하나님의 사랑은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자는 하나님을 닮은 매우 미세하고 약한 부분만을 사랑받고 있는 것이고, 후자는 하나님의 완전한 것으로 ‘간주되어’ 사랑 받고 있는 것에서 차이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사랑받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무언가이지, 우리 인간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의 가치는 반드시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에서만 확인되어야 합니다. 그 외의 것들은 하나님을 인간의 행복을 위한 들러리로 만드는 행위일 따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함 사이에는 중요한 관계가 있다. 실로 사람은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손상시켰으며 그 결과 그분의 거룩함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그분의 사랑이 사람에게 나타나게 되었다.” 인용한 이 부분은 구속사적인 측면보다는 복음의 시스템적인 논리적 순서를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손상시켰”다는 부분일 것 같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거룩은 절대로 손상될 수 없습니다. 그분의 거룩하심은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그 어떤 행동으로도 사실상 어떤 영향도 줄 수 없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그분을 모욕한다고 할 때에도, 그분은 그것에 대하여 어떠한 피해도 입지 않으시고 변화도 없으십니다. 따라서 그분의 거룩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이미 완전하시기 때문에, 거룩이 더욱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치 무언가 손상되듯이, 부족하듯이 하나님의 거룩이 충족되어야 하는 대상이 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의 거룩을 만족시키기 위해 무언가 필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거룩은 이미 스스로를 바라볼 때 완전히 충족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하나님의 거룩함에 위배되어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이 손상되어 그것을 만족시키기 위해 사탄을 구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솔직히 하나님 입장에서 거룩함에 위배되는 것들은 그냥 다 끝장내버리시면 그만입니다. 아니면 그냥 스스로 자멸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방법도 존재합니다. 어떤 것에도 하나님께서는 빚을 지지 않으신 분이십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하나님을 모욕한다고 해도, 인간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거룩에 위배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스스로와 삼위일체의 완전한 교제 속에서 완전한 충족과 만족의 상태에 계십니다.(하나님의 자족성) 따라서 그냥 무시하시거나 사탄처럼 내버려 두시면 그만입니다. 아니면 더욱 일찍 지옥에 보내시는 방법도 있습니다. 어느 방식이 되었건 우리는 그런 것들에 대해 부당하다고 따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슨 빚이라도 졌습니까? 우리가 그분에게 마땅히 받아야만 하는 것들이라도 있습니까?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걸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인간들은 그것을 우리 자신을 위해 감히 사용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는 것은 사탄을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매우 정당합니다.
그렇다면 사탄과 다르게 우리가 특별 취급을 받는 셈인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거룩함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려면 사탄 또한 하나님의 거룩함에 위배되므로 거룩함을 만족시키기 위한 작용이 마찬가지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탄의 경우는 그것이 지옥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몇몇 사람들이 지옥에 가지 않습니다. 이 특별대우의 근원은 사랑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그분의 거룩함이 요구한 것”은 아닙니다. 만약 그분의 거룩함이 이 사랑을 요구한 것이라면, 사탄에게는 왜 그렇게 하지 않았냐는 질문이 다시 대두됩니다. 그 역시도 하나님의 거룩을 심각하게 위배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사랑은 거룩함을 충족시키기 위해 온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랑은 그냥 사랑입니다.^^ 인간만을 특별 대우해 주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거룩함을 충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본성적인 이끌림에 대한 신적인 승인의 작용을 실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때문에 논리적인 순서가 제게 있어서는 조금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에 종속되시지 않고 초월하시기 때문에 사실상 그분에게는 이것이 하나의 순수한 단일성을 띄게 됩니다. 따라서 인간이 타락하실 것도 미리 아셨고 아실뿐만 아니라 그것이 실제로 발생하는 것을 막지도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는 인간의 타락이 우연이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우연이 타락하여 하나님의 거룩에 위배되고 부랴부랴 뒤에 예수님을 첨가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계획과 섭리 속에서 절대로 벗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지배하시고 자신의 통제에서 놓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이 모든 것을 그렇게 있도록 하신 이유는 오로지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그리고 그럴 자격과 권리가 있으십니다. 그분은 사랑받으실 만한 아름다운 분이십니다. 그분은 탁월하여 모든 존재에게 마땅히 칭송받고 열렬히 사랑받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비록 원죄로 인해 우리의 본성은 타락하고 하나님의 형상은 많이 약해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우리 인간은 분명하게 그분의 형상을 지니고 있습니다(창 9장).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이 있고,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우리 인간들보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자신의 의로우심을 나타내길 원하셨습니다. 만약 모든 인간이 죄인임에도 구원에 이른다면 아담의 범죄 및 인간 전체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전혀 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죄에 대한 혐오와 그분의 주권적인 권리를 충분히 보여주지 못한 것이 됩니다. 그것 조차도 사랑받으실 만한 것인데도 말입니다. 그래서 마땅히 그분은 그러한 것들을 모두 마음대로 다 보여주셔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탁월하심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분은 그분의 의지대로 누군가는 구원하시고, 누군가는 구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것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찬양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을 사랑하셔서 구원하시지만, 더욱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자신의 영광을 위해 선별적으로 구원하십니다. 이것은 거룩함을 충족시키기 위함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그분의 자유로운 선호, 즉 사랑이라는 의지의 작용이 궁극적인 목적과 동시에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을 사랑으로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을 위해, 그리고 그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 즉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요한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결론에 다다른 것은 참으로 진리를 맛보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4. 교회에서 거룩과 사랑이 충돌한다면?
비극적 이게도,아직 안 끝났습니다. 글이 너무 길어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자면,저 또한 거룩과 사랑이 교회 내에서 충돌할 때에는 가차 없이 거룩을 택하는 쪽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사랑은 하나님을 닮았지만 완전하지 않고, 인간이 악한 것을 사랑할 수도 있기 때문에 마냥 사랑이라는 감정을 승인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찬가지 논리로, 저는 거룩에 대해서도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교회에서 술을 마신다고 칩시다. 만약 그렇다면 아마 대부분의 목사님들 혹은 집사님들 등등은 노발대발하시면서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시고 술은 악한 것이며 술을 마시는 것은 거룩하지 못한 것이며 교회에 본이 되지 않으며 등등을 말할 것입니다. 사실 나시나 슬리퍼나 반바지의 예시보다도 이 술의 문제가 훨씬 심각한 상황을 초래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각자는 우리 스스로가 과연 거룩에 대해 잘 알고 있는지를 먼저 자문해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술을 드셨기 때문입니다(눅만약 술이 그 자체로 나쁘다면, 혹은 술을 먹는 행위가 그 자체로 거룩하지 않다면, 예수님께서는 거룩하지 않은 일을 행하셨다는 결론에 다다릅니다. 몇몇 분들은 이것이 성찬식에서 마신 것을 뜻한다고 주장하는데, 당시에는 성만찬을 시작하시지도 않았을뿐더러 당시 유대인의 관습을 볼 때 매 식사 끼니가 끝날 때마다 한 잔씩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예수님의 행동에 과연 어느 기독교인이 와서 “그것은 거룩하지 못한 것입니다. 잠언에 이르길 술은 쳐다보지도 말라고 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는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그 자체로 죄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술이나 나시나 슬리퍼나 반바지나 물건을 파는 행동이나, 그 자체로 지극히 중립적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반 은혜의 범주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문명의 발전이나 그로 인한 편의성과 발달 등등은 모두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위해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이런 발전들은 하나님과 무관하게 발생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통치에서 벗어나는 것은 단 한 점도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탁월한 것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나 칸트의 순수이성의 번뜩이는 논증이나 피카소의 입체 기법의 미학이나, 모두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셨다면 아마 이 세상에 없었을 것입니다. 술의 발달, 그것을 통해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 역시 일반 은혜의 작용 안에 있습니다. 특히 안토니 후크마의 종말론과 아브라함 카이퍼의 일반은혜라는 책들은 이에 대해 심도 있게 연구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거룩은 무엇을 향해야 합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내면이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외향적인 것, 특히 물리적으로 인식 가능한 죄들에 대해 지나치게 엄격한 면이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 내면의 것들, 정신적인 죄들, 특히 교만 등등에 대해서는 쉬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라고 하시는데, 술이나 나시나 슬리퍼나 반바지 보다 우리의 교만, 나의 자아를 왕좌에 앉히는 것, 하나님 보다 다른 대상을 더욱 선호하는 것, 하나님을 나의 이득을 위해 사랑하기로 선택하는 가증스러운 행동 등을 더욱 악하게 보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자는 중립적인데 반해 후자는 지극히 반역적이고 의도적으로 악하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에 나시나 슬리퍼나 그 밖에 다른 것들은 교회 내부의 규정 등에 위해 권고 사항으로서 지켜져야 할 것입니다. 다만 이것은 강제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것들 보다는 인간의 내면이 더럽고 징그럽고 추악하다고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외면적인 모습은 권고사항으로서, 특히 믿음이 굳세지 못한 자들에게 본을 보이기 위하여 지켜져야 할 필요는 있습니다. 거룩의 개념까지 나아갈 필요는 없다는 것이 제 조심스러운 의견입니다. 이 같은 것들은 초신자들이 정신적인 내면의 죄를 잘 몰아낼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을 더욱 쉽게 하도록 권고되어야 할 따름입니다.
또한 교회에 대하여는, 일반적으로 신학자들은 유형 교회와 무형 교회로 교회를 세분하여 파악합니다. 물론 이에 대한 설명 만으로도 책 몇 권이 나올 정도로 그 논의가 방대하지만,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무형 교회는 영적인 교회고, 유형 교회는 가시적인 교회를 뜻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부딪히는 모든 교회들은 이 유형 교회의 범주에 속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유형 교회들은 매우 많이 있고, 교단도 다양하며 교리도 상이합니다. 반면에 무형 교회는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어느 나라에 있든, 죽었든 살았든, 성도들이 모인 무리는 하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님께서 지향하시고 글에 언급하신 교회는 무형 교회를 뜻하는 것 같습니다.
이 땅에 무형 교회를 실현하고자 했던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번번이 모두들 실패했습니다. 왜냐하면 누가 참 신자인지 아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그럴 권한을 인간에게 주신 적도 없고 주실 생각도 없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은 그것을 판단하거나 어떻게 해볼 권한이 없습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자신의 회심 여부도 명확하지 않은 것이 인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와 사탄의 자녀를 구분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이상적 일지는 몰라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거룩한 모양과 행세를 하고서도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란 얼마든지 있을 것입니다. 애초에 그 거룩한 행세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의문이지만 말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것들 중 하나가 불신자들을 섬기되, 그리스도께 하듯 섬기라는 것입니다(엡 6:7 참고). 우리는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주께 하듯이 섬겨야 합니다. 물론 그들의 명령을 전부 따르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그들을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반드시 섬겨야 합니다. 우리의 행함은 누구에게 행하든지 주님께 다 돌려받을 것입니다(엡 6:8). 우리는 그들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고 자부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보다 우리가 보잘것없고 우리가 그들 보다 종이고 우리가 그들 보다 못난 것으로 여기면서 그들을 섬기듯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위치는 지극히 낮습니다. 높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높은 대우를 받는 것은 우리가 높아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높으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것으로 간주되었다고, 불신자들이 우리보다 낮아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가 여기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원하시지 않습니다.
물론 지나친 것들은 배제해야 할 것입니다. 유흥거리나 지나치게 중독될 만한 것들은 교회 내로 들어와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할 만한 그 어떤 것도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중립적인 것들, 음식 문화나 복장 문화 등등에 대해서는 신중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밀어내고 우리의 자아를 왕좌에 올려놓는지,그것이 죄를 짓기 쉽게 만드는지, 그것이 그리고 결정적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는 불신자들이 편하게 이용하는 것들이 그렇게 중대한 위협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거룩은 그런 방식이 아니라 내면의 문제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거룩은 그분이 고차원에서 구별되어 “다르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높고 낮음의 문제가 생깁니다. 고상하고 그렇지 않은 것의 문제가 주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거룩은 우리가 얼마나 낮아지고, 또 실제로 낮은지 인정할 수 있느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문의 여지없이, 교회에서 장사하는 사람보다 선하지 못한 사람을 더욱 미워하십니다. 장사는 그 자체로 중립적인데 반해, 후자는 매우 반역적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순한 양과 같고 어린아이와 같아야 합니다. 고상하고 거룩한 분위기의 무언가를 엄숙하게 지키는 것보다는 이것이 적어도 “예수님께서” 지향하신 거룩에 가깝습니다. 이것이 바로 많은 교회들이 사랑을 선택하는 이유입니다. 사랑이 곧 거룩입니다. 거룩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사랑이 많습니다. 참된 사랑을 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거룩으로 향합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의 사도라고 불립니다. 그리고 그만큼 겸손하며 거룩하며 경건했습니다. 바울도 믿음 소망 사랑 중 당연 사랑이 제일이라고 단언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곧 거룩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자신을 계시하실 때 스스로 “사랑”이라 불리길 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순수한 사랑에 가까울수록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설사 그것이 무언가를 용납하는 듯 보이고 경박해 보인다 할지라도, 순수한 사랑에 가까운 것이라면, 그 감정은 전적으로 옳습니다. 어린아이는 엄숙하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는 즐거워하고 놀기 좋아하고 순박하며 두 마음을 품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는 자신의 위치를 인정합니다.
따라서 제 생각에 교회 내에서 사랑과 거룩이 갈등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사랑과 거룩을 따로 분리하여 배타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어떤 견해 차이 때문이고, 성경은 그것을 따로 분리하지 않는다는 것이 옳은 것 같습니다. 진정 거룩을 향하는 사람은 사랑을 희생하면서 거룩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반드시 함께 갑니다. 또한 마찬가지로 순수한 사랑을 향하는 사람은 거룩에 가까워집니다. 물론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들 만이 성령의 능력으로만 이 사랑을 실제로 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5. 결론
길게 썼지만, 대부분이 논증에 들어간 것이라, 결론은 단순합니다. 거룩과 사랑은 항상 떨어질 수 없으며, 특히 하나님에게는 동일한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나 이 땅에서는 우리 자신의 위치를 자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같은 거룩을 지향할 순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거룩을 제시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모범을 보이셨던 사랑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향할 거룩은 반드시 사랑이 되어야만 합니다.
비록 성도님과 다소 의견의 차이가 있었지만, 성도님의 글을 읽으면서 즐거웠고, 또 답글을 쓰느라 하나님과 교제하면서도 즐거웠습니다. 사람이라는 것이 각자가 느끼는 바가 다르고, 제아무리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 해도 그 사람의 성향이 반영되기 때문에 의견 차이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제 의견은 그냥 제 주관적인 견해일 뿐이고, 객관적인 것이 결코 아닙니다. 어쩌면 성도님의 글이 백 번 옳으신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존중합니다.
부족한 글이나마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가 느끼듯 하나님과 몸을 부대낄수록 우리 자신이 정말 무지하고 아직 배울 점이 참 많구나 하는 것을 체감하는 것 같습니다. 또 한 편으로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탁월하시고 현명하시고 지혜로우시다는 사실이 정말 좋습니다.
좋은 교제와 사색의 시간을 제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쪼록 가정의 평안과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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