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침 탈출 이후... 신학에 대한 요즘 나의 생각의 변화 ("LIFE WORD MISSION" or "JBCH")

기독교 관련 생각들

대침 탈출 이후... 신학에 대한 요즘 나의 생각의 변화 ("LIFE WORD MISSION" or "JBCH")

바잇 카탄 2023. 11. 13. 15:07

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반응형

뱅커스 갓
뱅커스 갓

 


 

 

 과거의 글이나 댓글들 중 일부를 읽다가 문득 신학에 대한 최근 나의 시각에 변화가 생겼음을 느낀다. 대한예수교침례회라는 거대한 요람에서 탈출한 나는 정신없이 이곳 저곳을 발 빠르게 옮겨다니며 들쑤신 것 같다. 잘 모르는 분야에 뛰어드는 사람이라면 으레 그렇듯이 이 옷이 내게 맞는가 아니면 저 옷이 맞는가 하며 한참을 뒤져왔다.

 처음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대침과 대척점에 있었던 오순절주의였다. 대침의 깨사모에 누군가 올린 조각설교를 따라 은사와 열정적인 설교가 난무하는 각개전투의 장으로 나는 안내 받은 것이다. 한번 구원은 영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 끊임 없이 믿음을 점검해야 하며 성화에 집중하는 것, 죄에서 돌이키는 것이 그 당시 나에게는 매우 중요했다.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는 결단과 감동이 구원의 확신을 줬으며, 뜨거운 기도야말로 나의 자랑이었다.

 그런데 이것으로 만족스럽지는 않았나 보다. 왜냐하면 나의 본류, 내가 떨어져 나온 이단이라는 낙인이 찍힌 생명의말씀선교회라는 존재에게서 영원히 달아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가족들이 그곳에 다니고 있었고, 나의 아버지는 꽤 힘 있는 유명인사요, 임원이자 대침 목사의 든든한 오른팔이었다. 심지어 나의 아내도 대침에 소홀히 하는 나를 낯선 눈길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나는 가족들과 부딪히면서 나만의 길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대침이 무엇이 어떻게 틀렸는가를 짚어내기 위해 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리라 마음 먹었다.

 

 


 

 


 먼저 소위 '무물카페'라는 곳에 가입하여 정보를 검색했다. 거기서 많은 사람이 추천하는 루이스 벌코프의 조직신학을 무작정 구매하여 그냥 읽었다. 사실 나는 개혁주의가 뭔지도 몰랐고, 대침과 오순절주의의 영향으로 칼빈은 지옥 교리를 만든 사탄 같은 인간이라고만 알았다. 예정론이 바로 그 지옥 교리이며 정상적인 기독교인이라면 그런 사악한 가르침을 추종할 수는 없다고 인식했다. 그래서 책의 내용에 대해 엄청난 반감이 있었나 보다. 나의 책에는 그런 저항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이질적인 교리를 반박하고 공격함으로 나의 신념을 보호하느라, 한 챕터를 읽는데에 거의 한달을 소모했다. 아마 내용의 어려움 때문도 있었을 것 같다. 그 당시의 나는 독해력도 그닥 좋지 않았고 교양이나 지식의 수준도 그리 높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루이스 벌코프는 내가 얕잡아 본 것 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논리와 체계에 굴복하기 시작했으며 그가 예정론을 옹호하는 주장을 펼칠 때에 나에게는 반박할 능력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예정이라는 교리를 수호하는가 궁금해졌다. 이렇게 지적이고 사려깊은 사람이 왜 그런 교리를 굳이?하는 생각이었다. 나는 더 많은 자료를 찾으면서 점점 개혁주의에 젖어갔다. 존 파이퍼, 존 맥아더의 책을 사고 그들을 통해 마틴 로이드 존스에 대해 알아냈으며, 그의 책도 읽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의지의 자유"라는 책 역시 읽어봤다. 더 깊은 내용을 위해 헤르만 바빙크의 "개혁교의학"과 칼빈의 "기독교강요"도 읽었다. 안토니 후크마, 게르할더스 보스, 에이브러햄 카이퍼를 읽고 있을 무렵, 나는 내가 어느새 칼빈주의자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대침에 아직 남아 있는 나의 친구들, 곧 (나의 와이프를 포함한) 내가 학생이었던 시절 전도했던 그 친구들을 개혁주의라는 무기를 가지고 빼오기 시작했다. 그 과정은 상당히 성공적이었기에, 나는 이제 눈을 인터넷으로 돌려 무물카페나 바로세우기카페 등에서 나의 개혁주의적 결론을 널리 전파하고 대침 안의 사람들을 탈출시키리라 마음 먹었다(이 무렵 티스토리 블로그도 시작했다).

 그런데 인터넷 공간에 가보니, 사람들이 저마다 각기 자신들만의 교리와 사상을 가지고 서로가 서로를 향해 옳다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심지어 대침에서 탈출한 사람들끼리도 논쟁하고 싸우며 제각기 자기가 맞다고 소리를 질러댔다. 어떤 사람은 구원에는 믿음 뿐만 아니라 행함도 필요하다고 말했고, 또 다른 사람은 예정론을 말했으며, 그러자 중간에 안식교가 끼어드는가 하면 대침 측의 사람들이 조롱의 댓글을 달기도 했다. 킹제임스 우월주의자들도 잔잔할 때면 안부를 묻기 위해 가끔 들렀다. 대침이 복음은 정말 잘 가르치는데 다른게 문제일 뿐이라는 사람들도 나타났는데, 종종 양쪽 진영에서 다 얻어 맞았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만의 교리를 주장하면서 자기는 성령의 가르침을 받기 때문에 성경을 잘(?) 읽으면 자기의 가르침이 옳음을 깨달을 것이라 말했다. 적당히 활발히 활동하다가 자기 블로그나 유튜브 영상을 올리면서 홍보하고 자아실현 하는 사람, 지옥간증 영상을 올리는 사람 등등 정말 대침을 탈출한 사람들은 다 이렇게 무질서하고 각기 제 길로 가는가 보다 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어느 날 부터 '아, 나도 저렇게 자기가 옳다고 소리 질러대는 사람 중 하나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도 똑같은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저렇게 싸울 수밖에 없는 이유가 뭘까를 고민했다. 천천히 이분들을 관찰하면서 내린 결론은 제각기 성경 해석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이런 충돌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떤 본문의 참된 의미를 알게 된다면 이런 싸움이 어느정도 해결되지 않을까? 그 본문의 참된 의미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나는 두 가지의 노력이 필요함을 알았다. 하나는 성경의 원문을 읽어내는 능력을 키우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역사는 무엇을 말하는가를 추적하는 것이다.

 사실 이 두 가지 중 더 쉬운 것은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었기에, 나는 먼저 기독교 교회사 책, 곧 윌리스턴 워커의 교회사 책을 구입했다. 그런데 이 책은 상당히 역사를 축약하여 설명해놨기 때문에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진 않았다. 다만 여러번 읽는 과정에서 전체적인 큰 흐름만을 파악했을 뿐이다. 확실한건 바빙크의 개혁교의학에 나온대로 교리의 변화들이 눈에 띄었다. 그러다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필립 샤프의 8권 교회사 전집을 구입했다. 그리고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교회사 책도 틈 나는 시간에 함께 읽기로 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교회사를 파 들어가면서 나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내 생각 보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어떤 합의된 체계나 믿음의 고백이 상당히 적은 것으로 보였다. 그들은 심각한 오류에 쉽게 빠졌으며, 여러 다양한 미신들과 항상 함께 했다. 오리겐의 알레고리적 해석은 나를 적잖이 당황시켰으며, 아우구스티누스의 몇몇 주장은 나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교회사에는 내가 이단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천지였던 것이다! 나는 고민에 빠졌다. 교리적으로 엄밀하지 못한 이들을 나는 포용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들은 틀렸기 때문에 구원에서 배제된다고, 즉 이단이라고 봐야 하는가? 나는 아리우스주의자들 전체가 구원 받을 수 없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펠라기우스, 혹은 반펠라기우스는 어떠한가? 양태론자들과 네스토리우스주의자들은 어떡하지? 성인 유물을 존귀하게 여기는 초대 교회 신자들은 다 지옥에 가나? 마리아 무원죄 잉태를 지지하는 자들은? 연옥을 믿은 신도들은? 그런데 이렇게 가면 가톨릭에 대한 나의 입장은 어떻게 해야 하나?

 훌륭하다고 알고 있던 종교개혁자들의 추태와 배타성, 극단적인 광기들, 청교도인들의 비윤리적인 모습들과 잔혹함, 피에 굶주린 모습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루터가 츠빙글리가 죽었을 때 좋아하는 모습을 보았다. 칼빈의 익히 알려진 추방, 처형 등의 잔인한 결정들을 보았다. 그 시기에 나는 내가 믿는 개혁주의적 관점이 절대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의심이 들었다.

 그 무렵 나는 창세기를 시작으로 히브리어를 배우며 성경 주석과 함께 원문을 해석하는 작업에 돌입했다. 교회사를 읽으면서 생겨난 혼란들이 성경을 원어로 읽을 때 해결되리라 생각, 아니 착각했다. 그것은 순진한 생각이었음이 주석을 읽자마다 느껴졌는데, 왜냐하면 창세기 주석을 쓴 구약학자는 나에게 대뜸 창세기가 단일 저자가 쓴(당시 나의 신념으로는 모세가 쓴) 것이 아니라 J, E, D, P 등의 여러 문서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바벨론 유수 이후에 기록되었을지 모른다는 학자들의 가설들을 쏟아냈기 때문이다(물론 그 저자는 이른 연대를 지지하는 학자였지만). 도대체 벨하우젠은 뭔가? 궁켈은 또 누구야? 창세기가 설화라는 거야? 이 히브리어 본문은 왜 문법 체계를 따라가지 않지? 불완전한 문장이 왜 이리 많은거야! 바이크톨? 웨카탈? 히트파엘이나 호팔은 알겠는데 아슈타펠은 뭐지? 이 단어는 뜻을 모른다고? 그럼 뜻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는데 번역을 그냥 한 거였어?(이거 때문에 HALOT 삼..)

 그리고 동시에 헬라어를 배우면서 로마서를 집어 들었을 때, 내 눈 앞에는 불트만과 칼 바르트, e. p. 샌더스와 n. t. 라이트가 춤을 췄다. 슈바이처는 위인전에서 그냥 아프리카 의사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역사적 예수 논쟁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인 것을 알고 정말 새로웠다. 캐제만, 위더링턴이 정말 많이 나왔고 f. f. 브루스도 그랬다. 헬라어 사본들의 이본이 정말 많다는 것, 그리고 초기 헬라어 사본들은 띄어쓰기나 문장부호 따위는 취급하지 않았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학자들은 계속 논쟁한다. 시제가 현대인의 언어 처럼 엄밀하게 시간 개념을 나타내는게 아니라 동작의 의미였다는 것도 신선했다.

 그래서 자유주의 신학, 즉 현대 신학이 궁금해졌다. 칼 바르트의 로마서를 읽으면서 이 사람이 왜 이렇게 화났는지 정말 궁금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철학사를 사고, 철학자들의 책을 읽었다. 플라톤은 익숙했지만 데카르트나 데이비드 흄은 어려웠다. 칸트는 나를 겸손하게 꿇어 앉혔고 헤겔은 내 머리를 발로 밟았다. 슐라이어마허, 리츨, 틸리히, 불트만 등등.. 이 쯤 되니 엄격한 교리라는 것이 정말 성경이 말하는 것이 맞는지 의구심이 생긴다.

 

 


 

 


 ANET 과 같은 고대 근동 문헌들이나 1세기 팔레스타인에 대한 책들을 읽다 보면, 성경에서 말하는 것이 교회가 가르치는 것과 약간 다르다는 느낌이 자꾸 든다. 예정론이란 것도, 바울이 말하려고 했던 바가 칼빈이나 아우구스티누스가 정립한 것과 동일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과연 교회에서 가르치는 교리들이 예수님의 말씀 그 자체의 의도를 파악한 것인가? 그렇게 방황하고 있을 때, 로크를 읽으면서 내가 내린 결론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인이며, 이것에 배타적으로 반응하는 집단, 혹은 단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지, 그 밖의 교리적인 다양성은 포용 받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감리교, 장로교, 가톨릭, 성공회, 루터교, 동방정교회, 재세례파 등이 나에게는 그들이 만약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자 메시야로 믿고 고백한다면, 하나의 교회이며 모두 형제 자매이다.

 그래서 대침의 배타성, 즉 자신들 외에는 복음을 제대로 잘 가르치는 곳이 드물다는 생각, 자신들이 성경을 가장 잘 가르친다는 오만함은 정말 위험하다. 내 생각에 대침의 구원론이나 종말론이나 어떤 교리 자체의 문제점 보다도 이것이 더 위험하다. 그리고 아마 그들 역시 배타성을 어떻게든 사수하려고 할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만약 대침에 배타성이 사라진다면, 더이상 신도들이 그들의 명령에 순종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만약 대침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뜻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는 배타적인 사상이 포기된다면, 그들의 명령에 의해 바쁘게 봉사 할 이유도, 무리하게 건축헌금을 할 이유도, 여가와 일상을 포기할 이유도, 직업 선택에 영향 받을 이유도, 결혼을 대침 내에서 할 이유도 전부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단 생활! 보러 가기>

 

이단 생활! -프롤로그- (기독교 이단 웹툰)

기독교 이단 경험을 바탕으로 만든 일상(?) 웹툰입니다. 이단 생활! -1화- (기독교 이단 웹툰) littlebiblicaltheology.tistory.com

littlebiblicaltheology.tistory.com

 

반응형

이 글이 도움이 되었다면 ♡를 눌러 주세요. 익명성이 필요한 질문일 경우 Q&A 카페를 이용해주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