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바잇 카탄 in 성경과 작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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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는 장면은 많은 사람들에게, 특별히 자녀가 있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일 수 있다. 동희 작가 역시 이 부분에 대해서 필자에게 아이를 바치라는 것은 너무 잔인한 것이 아닌가, 그리고 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런 명령을 내리셨는가에 대해 질문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간략하게 답하도록 하겠다. 물론 이 설명이 완전한 해답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도시 중 하나인 "우르(אור)"에서 이주한 고대인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인신제사가 존재했으며 따라서 아브라함도 이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이 인신제사는 아브라함 시대에만 국한되어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열왕기하 3장 26절에서 모압 왕은 북이스라엘 왕 여호람과 전쟁을 벌이다가 자신들의 패배를 직감하자 자신의 장자를 성벽에서 번제로 태워버린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경악을 했으며 결국 후퇴하였다. 이처럼 메소포타미아 시기 뿐만 아니라 남유다-북이스라엘 시기 때에도 인신제사는 상당히 빈번하게 있었던 고대 근동의 악습이었다.
인신제사의 흔적은 토라에도 남아 있다. 출애굽기 22:29-30, 그리고 34:20을 보면 사실상 이스라엘 민족의 모든 장자는 하나님께 바쳐져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장자들이 그것으로부터 구원을 얻고 대신 동물이 바쳐지도록 하셨다. 후에 레위 족속들은 각 가족의 장자를 대신해 바쳐진 것으로 간주되었다(민 4:45-49).
아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장자를 바치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은 고대 근동의 흔한 풍습을 떠올리며 "올 것이 왔다"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는 필자의 추측이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인신제사가 신에게 자신의 열성을 보여주는 한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정말 바칠 생각이었는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지 않도록 하실 것을 믿음으로 인지했는지 창 22장의 본문은 상세하게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풍습과 같이 신을 위해 첫 아들을 바치기 위해 모리아 땅으로 간다.
그런데 하나님은 고대 근동의 다른 신들과는 다르다. 하나님은 인신제사를 혐오하시며 이것을 금하신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양을 예비하시어 이것을 막으신다. 나는 이것이 하나님의 독특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독교 사상이 충분히 퍼져서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현대인 시각에서는 인신제사는 당연히 미신적이고 미개하고 잔인한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이렇게 주변 도시 국가들이 모두 인신제사를 보편적으로 행하고 있을 때에 단호하게 "아니다!"라고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창세기와 출애굽기는 지속적으로 고대 근동의 신들과 하나님을 대조하곤 한다. (히브리어로 성경을 독해하며 성서학자들의 책을 읽는 분들이라면 이것이 무슨 말이지 잘 알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과는 다르다. 하나님은 인간을 죽여 바치는 제사를 혐오하시며 그것을 대신할 것들을 고안하신다. 하나님은 그런 문화와 풍습에 저항하시며 진정한 인권을 위해 고민하시는 분이다. 나는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이런 것들을 보여주려는 목적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모압 왕이 자신의 첫 아들을 태워버렸을 때,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충격을 받을 만큼 충분히 "정상적"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통해 무엇이 정말 중요하고 무엇이 인간을 위한 것인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뭐가 대단한지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의 세계 전체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적군의 왕이 자기 아이를 태울 때 이것을 보고 애통해하고 분하게 여기는 이 간단한 인류애적인 감정 조차 굉장한 혁신이었다.
그리고 이 인류애적인 사랑의 감정은 후에 예수께서 자신의 몸으로 실천하셨으며 자신의 존재를 바침으로써 완전하게 나타내셨다. 이삭을 위해 준비된 또다른 양처럼 말이다. 누구든지 교회사를 면밀하게 살펴본다면 고대의 악습들, 여성을 소유로 여기는 것, 아동 살해와 낙태, 노예 제도, 온갖 폭력적 착취 등에 대해 기독교인들이 싸워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천부인권설"의 바탕은 기독교적 사상이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문명을 바꿔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이야기는 고대의 인신제사 풍습이 어떠했는가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것을 막으시고 짐승으로 대신하시는 것은 이제 이런 방식의 끔찍한 제사를 중단하도록 만들겠다는 그분의 의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은 후에 확장되어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선명하게 드러난다. 온갖 잔인하고 악한 것은 예수께서 지고 가신다. 이제 인류에게 당도한 것은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와 바른 윤리적 문화를 향한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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